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1. 이태석 신부님 이야기를 담은 기록 영화 “울지마 톤즈”가 전세계에 퍼져 나가 동시대인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미국 3대 영화제 중의 하나인 휴스턴 국제 영화제는 다큐멘터리 부분에서 “울지마 톤즈”를 대상 작품으로 선정했고, 영국 상원의원인 알톤 경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인 최태복 씨에게 “울지마 톤즈” DVD를 선물했습니다. 알톤 경은 말합니다. “북한 체제를 비판하거나 그럴 생각으로 그것을 선물한 것이 아닙니다. ‘울지마 톤즈’를 통해 감동받고 같은 한국인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그들이 그 기록 영화를 보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한 인물의 삶에서 감동받기를 희망했습니다. 우리가 힘으로 대결하는 것을 사랑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을 아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뒤바꿔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만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모든 것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성실한 신앙인에 의해서, 특히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통해서 지금 계속 입증되고 있습니다.
2. 미국 명문 대학들에서는 입학 때부터 봉사정신을 중요한 기준으로 설정하고 교육기간에도 ‘섬기는 지도자상’을 강조해서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런 지도자상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센터 책임자가 이태석 신부님의 기록 영화를 보고 한 말은 우리 모두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기록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부님이 세상을 떠난 후의 눈물이나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보았는데, 내가 받았던 가장 큰 메시지는 신부님이 얼마나 멋지고 기쁜 삶을 살았는가, 우리도 그분처럼 섬기는 지도자로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돕는다면 얼마나 멋지고 기쁜 삶을 살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기록 영화 제작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 신부님의 상을 통해서 이 사회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하던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어떤 권력의 힘도 아니고 돈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16)이시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3. 2012년 10월에는 전세계 주교들이 교황님과 함께 “새로운 복음화”를 주제로 교회의 선교 역사에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화”에 왜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남미 선교 500주년 기념 제19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 총회 강론(1983.3.9.)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이 표현을 썼습니다. 한때 선교사 한 명이 백만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지만 복음이 사람들 속에 깊이 침투하게 만드는 데까지 가기에는 미흡했던 남미뿐 아니라, 세속화의 거대한 흐름 속에 휩싸여있는 유럽에 이름뿐인 신앙인들이 많다는 현실을 반영한 표현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표현을 써서’ 복음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삶과 그것을 감동적으로 담아낸 기록 영화,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새로운 복음화가 과제로 삼고 있는 문제들과 그 해답의 방향이 거의 모두 거기에 암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이 신부님의 삶에 감동을 느끼고 그것을 정확하게 포착한 이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점이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선교-복음화는 본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는 것이 그 요체입니다. 그것을 빼면 교회의 신자 수는 늘어날지 몰라도 복음화는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경우에, 선교와 진정한 사랑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현실 때문에 새로운 복음화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바오로 사도 역시 세례 베푸는 일과 복음 전하는 일을 따로 떼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1,17). 어느 시절에나 인간적 말재주로 인기를 끄는 사람일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거나 적당히 얼버무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구원, 부활, 영원한 생명 등 그 자체로는 더 없이 좋지만, 잘못 이해하면 자기 한 몸 잘되는 데에만 생각을 기울이게 할 위험이 있는 표현들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좋은 말들은 교회가 세상을 위한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있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뜻으로 사용되는 셈입니다.
베네딕토 15세 교황께서는 1917년 회칙 『인류』(Humani Generis)에서 바오로 사도를 복음 선포자의 주보로 선언하셨습니다. 깊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복음 선포를 준비하셨다는 점에서, 그 선포의 내용에서, 그리고 그 선포의 방법에서 모두 복음 선포자들의 모범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그런 면모를 특히 코린토 1서 1-2장에서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목을 깊이 숙고하고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세례를 베푸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이 따로 떨어지지 않고, 본래의 취지 그대로, 복음이 전해진다는 말은 곧 사랑이 전해진다는 말이라는 사실이 누구의 눈에나 드러날 수 있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면 그것을 전하는 사람 자신이 먼저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되고 그 전하는 소식이 틀림없는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이런 사랑을 먼저 체험하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말은 ‘증언’입니다. 증언은 자기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먼저 체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확신에 차서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하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따릅니다. 그래서 ‘증언’과 ‘순교’는 성서에서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성령이라는 불길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전하는 사람도 같은 성령 속에서 깊이 묵상해야만 그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자들의 말이 성령의 불길 속에서 하는 말, 불타는 말이 아니면, 그것은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처럼 공허하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 1).
복음 선포자들의 말이나 행동이 증언으로서의 특성을 띌 때, 그들은 참으로 주변 세계를 건강하게 하고, 밝게 해주는 소금과 빛이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2011년 10월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장 이 병 호 주교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