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78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여천 홍범도 장군.
그런데 홍범도·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천주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바로 1920년대 간도 지역 교우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군 의민단입니다.
맹현균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해외에서 추진한 독립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안중근 일가의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북간도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의민단의 활동입니다.
<조한건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3·1운동 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나서요. 일주일 후 쯤에 간도에 있는 용정본당까지 소문이 났습니다. 용정본당에서는 천주교 미사 종소리에 맞춰 태극기를 몰래 숨겨서 독립 만세 운동을 그해 벌이거든요. 바로 그 지역에서 활동했던 것, 일어난 것이 의민단입니다. 1920년대 초에 활동하고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고, 그런 의미에서 의민단은 천주교 독립운동 역사에서 너무 큰 의미가 있고."
신자들의 헌금으로 운영된 의민단은 재정 상태가 다른 독립 운동 단체에 비해 윤택한 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그만큼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조한건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1920년대 초에 천주교인으로 구성된 무장 독립운동 단체였고요. 만주 연길, 간도 지역이죠. 교우촌이 그 전부터 있었거든요. 그쪽에서 신협 활동 같은 게 아주 활발하게 잘 이뤄지고 있었다고 해요. 천주교 신자들이 헌금을 걷어서, 신협 자금에서 조직에 단체에 자금을 지원해주면서 조직적으로 활동할 수 있어서요.
의민단은 2~3백여 명의 병력 규모에 400정 이상의 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했습니다.
단장은 방우룡이라는 인물이었으며, 참모장 김종헌, 영장 허근, 재정부장 홍림 등이 있었습니다.
일제의 압력으로 무산되긴 했지만, 의민단은 사관 양성소를 설립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20년 9월 29일 의민단은 대한신민단, 대한광복단, 대한국민회 등과 연합해 북로사령부를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1일 이후에는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의민단원들은 전투 이외에도 일본군 정찰, 일본 군수품 파괴, 군자금 모금 활동 등을 펼쳤습니다.
간도 명월구성당과 단장 방우룡의 집은 의민단의 사령부였습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 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의민단을 비롯한 독립군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령 자유시로 집결했습니다.
그러다 한인 무장세력 간 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자유시 참변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독립군이 죽거나 체포됐습니다.
<조한건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의로움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게 천주교 신자였거든요. 의로운 사람들의 모임을 구성하면서 신앙의 이름으로 또 자유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모임이 의민단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천주교의 독립 운동 단체에서는 의민단이 특별하고 천주교 신자들도 국가를 위해서 열심히 몸으로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위해서 힘썼다는 것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홍범도 장군과 함께 전장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던 의민단.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과 동료들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조한건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사실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전 재산을 봉헌하고, 온몸을 봉헌하면서 사실 운동을 했었던 것이거든요.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홍범도 장군의) 유해 송환을 계기로 해서 그분들의 삶, 그분들의 노력들 다시 되새기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CPBC 맹현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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