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6일자 수원주보 5면
신앙에세이
나는 예수님과 한식구인가?
주민센터에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으러 가는 길에 아주머니 두 분이 운영하는 꽈배기 집에 들렀다. 즉석에서 만들기 때문에 느껴지는 늘 따뜻하고 말랑말랑 뽀송뽀송한 꽈배기의 식감에, 더불어 값도 저렴해서 기분 좋은 빵집이다. “비닐 봉투 안 쓰시나 봐요?” 종이봉투에 가득 담아 주시는 꽈배기를 보며 내가 말을 건네자, “손주들이 북극곰을 살려야 한다네요.”라고 답하신다. 이 장면을 예수님이 보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나는 이 여인보다 더 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아주머니가 신자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주머니가 기후온난화와 환경오염 문제를 잘 몰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복음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신앙인들보다, 듣고 공감하면 즉시 행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어여쁘게 보실 것이다. 그 행동이 늘 거창할 필요는 없다. 항상 소중한 것은 작은 데서 시작되는 까닭이다. 오늘 내가 세상과 타인에게 베푼 작은 친절이 하느님의 자비를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는 말을 복음서에서 자주 읽지만, 정작 가난해질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신앙생활이란 게 이승에서 복락을 누리고, 그 복락을 저승 가서도 누리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믿음은 불순하다. 부자의 집 문간에서 개가 종기를 핥던 거지 라자로가 저승에서 복락을 누리고, 이승에서 복에 겨워하던 인색한 부자는 저승에서 이를 갈며 후회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늘 갑질하던 버릇을 남 주지 못하고, 저승 가서도 라자로를 부려먹으려던 부자에게는 미래가 없다. 아버지의 나라에는 머물 곳이 많지만 그런 부자를 위해 마련된 방은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양파 한 뿌리’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생전에 한 번도 선행한 적이 없던 어느 할머니가 죽어서 지옥 불구덩이에 던져졌다. 다행히 수호천사는 언젠가 할머니가 밭에서 캔 양파 한 뿌리를 거지에게 적선한 사실을 찾아냈다. 하느님은 “그렇다면 할머니가 그 양파 뿌리를 붙잡고 천국으로 오게 하라.”고 선처해 주었다. 수호천사는 양파 뿌리에 매달린 할머니를 조심스레 당겨 올렸다. 지옥에서 반쯤 빠져나왔을 때, 다른 죄인들이 그걸 보고 “나도! 나도!” 하며 매달렸다. 할머니는 자기만 구원받으려고 “이건 내 양파야! 내 거라고!”하며 다른 사람들을 걷어차 버렸다. 그 순간 양파가 똑 부러지고 모두가 지옥불로 다시 떨어졌다.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니다. 우리가 한사코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서만 기도하기를 고집한다면, 예수님과 한 식구가 될 마음이 없는 것이다. 세상 한구석에서 배제와 차별, 가난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나처럼, 내 식구처럼 여길 줄 알아야 천국의 문이 열린다. ‘나’만의 천국은 없다, ‘우리들’의 천국이 있을 뿐. 예수님은 지금도 거듭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글. 한상봉 이시도로(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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