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9일자 수원주보 5면
신앙에세이
종악이, 종악이 엄마 복녀 이시임 안나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동네 호숫가의 이팝나무들이 모두 웨딩드레스를 입은 듯 미색의 꽃들로 화사하다. 5월은 하얀 꽃들이 무수히 피어나는 때이다. 이팝나무와 야광나무, 찔레꽃과 아카시아까지. 그래서 인디언 아라파오족은 5월을 ‘오래전에 죽은 이들을 생각하는 달’이라고 명명했다.
오래전에 죽은 이들 중 ‘종악이 엄마’로 불린 복녀 이시임 안나(1782~1816, 충청도 덕산)는 정다운 숙모처럼 친근하게 불러보는 이름이다. 몇 년 전, 경북 영양이 고향인 소설가 L선생님과의 식사자리에서 순교자 강완숙 골롬바의 일생을 소설로 준비하고 있다는 나의 소개말에, 자신도 고향에 내려오는 어떤 천주교 순교자를 소설로 써보고 싶었다며 들려준 얘기에서 처음 이시임 안나를 알게 되었다. 조선 후기, 한 천주학도 여성이 동정녀 공동체를 찾아가느라 강을 건너다 뱃사공의 완력에 의해 그와 혼인하여 살게 된다.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는데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자, 이들 모자는 산속의 교우촌을 찾아 경북 영양 지방으로 간다. 그러나 곧 여기까지 박해의 불길이 덮쳐왔고 포졸들이 동네의 천주학도들을 굴비 엮듯 잡아가자, 그녀는 주위의 소나무 가지를 꺾어 십자가를 만들어 포졸들에게 보이고 대구감영으로 끌려가 참수당하는데 영양 지방의 무연고 묘지 하나가 바로 그녀의 무덤이라는 이야기였다.
영양 지방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찾아보면 이 여성 순교자는 복녀 이시임 안나이고 복녀의 아들의 이름은 ‘박종악’이다. 이야기의 뒷부분이 구전 과정에서 덧붙여졌거나 아니면 교회사가 다 찾아내지 못한 복녀의 삶을 전해주는 디테일일 수 있다. 교회사 기록을 보면 네 살배기 종악이는 엄마와 함께 대구감영의 옥간에서 지내다 엄마 품에서 죽는다. 그리고 곧 복녀 이시임 안나도 순교한다. 꽃처럼 짧은 종악이와 복녀의 한 생을 듣고 읽으며 두 영혼은 하얀 찔레꽃잎으로 화해서 내 핏줄을 타고 흐르는 잊을 수 없는 이들이 되었다.
일을 마치고 어두워지는 신반포역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늘어선 이팝나무 가로수들이 피워낸 상앗빛 꽃에 또 다시 둘러싸였다. 그 모습이 ‘이밥’, 쌀밥처럼 보여서 이팝나무라고 한다. 복녀와 어린 종악이가 대구감영의 옥간에 갇혀 지내던 1815, 6년은 대기근의 해로 감옥 안의 식량사정은 험악했다. 얼마나 굶주렸을까, 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이팝나무 꽃들은 더욱 수북수북 밥을 담은 모습으로 오래 전에 죽은 네 살배기 아가와 젊은 엄마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글. 이규원 사라(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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