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9일자 수원주보 4면
기해박해 180주년 - 함께! 목자와 양
수원교구의 교회사적 위상과 역할
1963년 설립된 수원교구는 본당과 신자수 등에서 한국 제2의 교세를 갖춘 역동적인 교구로서, 한민족 복음화의 중심교구로 부상하고 있다. 이같은 위상은 바로 수원교구가 갖고 있는 ‘교회사적 역량’에서 나온다.
수원교구는 일찍이 100여 년의 모진 박해를 이겨낸 신앙선조들의 순교신심과 거룩한 순례자의 영성이 솟아나오는 순교의 보고(寶庫)를 이루어, “순교자와 성지의 교구”로 일컬어질 정도였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로 평신도에 의해 자발적으로 설립된 한국천주교회의 초창기(18세기 말) 복음실천 운동의 중심지였던 수원교구는 이벽 요한 세례자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의 활발한 전교에 힘입어 한강의 수운(水運)을 활용하여 수도권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신앙공동체를 확산시켜 나간 초창기 한국천주교회의 요람과 같은 곳이었다. 또한 신태보 베드로와 정하상 바오로 등 수원교구의 신앙선조들은 1801년 신유박해의 광풍 속에서 폐허가 된 한국천주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곳곳에 교우촌을 건설하고, 중국에서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을 영입하는 데 앞장선 결과, 마침내 1831년 조선교구 설정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제와 함께 수원교구 지역 내 곳곳을 다니며 성사를 집전하고 복음을 전하며 신자공동체를 튼튼히 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근대적 신학교육을 받기 위해 1836년 중국 마카오에 파견된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등 신학생 3명의 출신지 또는 거주지가 모두 수원교구 지역이었으므로, 수원교구는 박해시기 한국천주교회 방인 성직자 양성의 못자리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의 부모와 형제, 친지들은 곧이어 닥친 1839년 기해박해의 시련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과 굳센 믿음을 드러냄으로써 오늘날 수원교구가 순교영성강학 등을 통한 순교자 현양과 순교신심 교육의 모범적 교구가 되게 만들었다.
글.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