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2025년 노동절 담화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
노동절을 맞이하여, 1987년 1월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박종철 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인권 회복 미사 강론)라는 성경 구절을 빌려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외치셨던 고(故) 김수환 추기경님의 강론이 새삼 떠오릅니다. 추기경님의 말씀은 불의한 죽음에 대하여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던 당시 사회를 일깨우고, 그로 말미암아 깨어난 시대의 양심은 우리 사회를 민주화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노동 현장에서도 이제 우리의 양심이 모두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노동자들과 시민들은 ‘양심적 연대’로 열악한 노동 현장 속 부조리를 많이 개선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기만 합니다. 정치의 영역과 달리 노동 현장에서 정의 실현은 너무나 더디고,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 주장과 연대는 점점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동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는 어디에서 비롯하였을까요? 저는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양심의 무뎌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윤과 성공만 좇는 성과주의, 이기주의, 물신 주의, 그리고 여기에서 생겨난 차별과 배제의 태도는 어느 순간 ‘삶의 정당한 방식’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넘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한국인과 외국인 노동자를 구분하는 ‘새로운 계급화’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생겨나는 불평등과 인권 침해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에다 ‘나만 아니면 괜찮다.’는 문화까지 결합하여 기업과 나라의 발전을 꾀하는 데에 일부 노동자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비인간적 경제 독재”(「복음의 기쁨」, 55항)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나이 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복음의 기쁨」, 53항)라며 한탄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은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는 참담한 모습들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여러 혜택을 받는 외국인 투자 기업의 여성 노동자들은 450일 넘도록 불탄 공장 옥상에 올라가야 하였고, 천문학적인 영업 이익에도 손수 만든 ‘철 감옥’에 자신을 밀어 넣었던 조선소 하청 노동자는 다시 30미터 철탑 위에 서야 하였습니다. 이들은 수많은 다른 노동자처럼 부당한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경제적 법적 제재와 무관심이었습니다.
물류 창고와 거리, 건설과 산업 현장에서는 무더위와 추위, 살인적인 노동 시간과 허술한 안전 조치 등으로 여전히 많은 노동자가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2010년 뜨거운 용광로에 떨어져 숨진 20대 노동자의 죽음은 15년이 지나 또 다른 20대 계약직 인턴 노동자의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국부 유출과 일자리 탈취의 주범으로 혐오하던 이주 노동자를, 기존의 차별과 혐오의 문화는 아직 해결하지 않은 채 저출산이 불러온 부족한 노동력의 대안으로, 다시 말해 오직 경제 성장을 위한 ‘노동력의 대체 부품’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또한 기후 위기와 인공 지능(AI)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 변화 속에서도 노동자의 미래는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경제는 이윤만이 아니라 도덕성의 요구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간추린 사회 교리』, 331항 참조). 기업은 소수의 이익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호하는 관점에서도 경영해야 합니다(『간추린 사회 교리』, 281항 참조). 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한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한 생태적 관점에서도 경영해야 합니다(『간추린 사회 교리』, 340항; 『찬미받으소서』, 141항 참조). 그렇게 할 때에 기업은 도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윤 추구와 도덕성이 조화를 이루기는 쉽지 않습니다(사목 헌장, 8항 참조).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이러한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사목 헌장, 16항 참조).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양심은 보편적 진리와 공동선과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세상을 “인간다운 사회”(『간추린 사회 교리』, 134항)로 바꾸어 줍니다. 그러나 양심은 동시에 끊임없이 가꾸고 돌보아야 하는 대상으로, 개인과 사회의 양심이 무뎌지면 우리 사회의 불의는 더욱 커집니다. 그리고 무뎌진 양심의 퇴행은 결국 정치 영역뿐 아니라, 경제 영역 특히 노동 안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더욱더 구조화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가장 가난한 노동자, 비정규직-하청, 청(소)년-노인, 여성 그리고 이주 노동자 등에게 큰 고통과 피해를 줍니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 공권력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주요합니다. 국가가 ‘도덕적 양심’을 바탕으로 경제와 노동 정책을 수립하고, 노동자를 온갖 피해에서 보호할 때 우리 사회를 더욱 인간다운 사회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간추린 사회 교리』, 337-339항 참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나머지 아벨을 죽인 카인의 무딘 양심은 동생의 죽음에 모르쇠와 무책임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양심을 잃어버린 인간과 사회와 경제는 정의와 사랑이 아니라 불의와 불평등과 적자생존만 있을 뿐입니다. 양심이 없는 비도덕적 경제 사회에서는 ‘돈’만 살아남을 뿐 노동자, 아니 인류 전체는 모조리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너의 형제 노동자는 어디 있느냐?”는 이 시대의 물음에 정직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노동자의 수호자 성 요셉,
노동자와 그의 가족 그리고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2025년 5월 1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김 선 태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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