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님의 서한 가운데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모두 31통입니다. 그 중에서 압수되고 유실된 것들을 제외하고 현재 19통의 서한이 남아 있습니다. 이 땅의 많은 순교자들의 기록이나 전해지는 사화(史話)들이 우리에게 남아 절절한 신앙의 증거를 느끼게 되고 교회 안에 성령께서 살아 계심을 알게 되지만, 특별히 김대건 신부님의 서한을 읽다보면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는 목자의 기도를 듣는 것과도 같아 그야말로 ‘사제 영성’을 묵상하게 됩니다. 여러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천주 자비와 안배하심에 의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교우들에게도 그러하기를 온 마음으로 당부하였던 사제 김대건은 그 짧았던 사제로서의 삶과는 달리 우리 모든 사제와 신앙인들의 여정 안에 영원히 살아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삶의 지향과 영성을 따라가다 인상적인 한 표현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하느님을 ‘임자’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태어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없고, 살아 있더라도 쓸데없습니다. 비록 주님의 은혜로 세상에 태어나고, 주님의 은혜로 영세 입교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었을지라도 그 이름이 또한 귀하다고는 하지만 결실이 없다면 그 이름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 주님께서는 땅을 밭으로 삼으시고, 우리 사람을 벼로 삼으며, 은총을 거름으로 삼으시고, 강생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시어 자라고 여물도록 하셨습니다. 심판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여문 사람이 되었으면 주님의 의로운 아들로 천국을 누릴 것이요, 만일 여물지 못했으면 주님의 의로운 아들이라고 하나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을 것입니다.”(김대건 신부님의 마지막 회유문)
이처럼 ‘임자’는 창조주 하느님을 천지만물의 ‘주인’으로 섬김에서 나오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흔히 입에 밴 말처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 것과도 같은 의미가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주인으로서의 ‘임자’는 조금 더 많은 것들을 묵상하게끔 우리를 이끌어 주는 듯합니다. 당시의 충효 사상 위에서 하느님을 설명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주인이자 임금이요 아버지’ 이신 분을 드러내기도 하여, 그분께 대한 신뢰와 따름이 마땅함을 알려주고 그 신뢰와 따름이 밖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도 가르쳐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딱딱하게 여겨질지도 모르는 이러한 유교적 사상에서 그치는 표현만은 아닙니다. 신부님의 영성은 한걸음 더 나아가 임자에 대한 사랑으로 커집니다. 환난에서 보호해주시기를 청하고 의지하는 것도, 그분의 거룩한 뜻을 따라 ‘여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도,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자 다짐하는 것도, 그렇게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事主求靈事) 모두가 ‘임자를 향한 사랑’ 때문에 행하게 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줍니다. 내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닫힌 사랑이 아닌 임자를 향해가는 사랑이 중요함을 배웁니다.
단순히 주인이신 분, 임자를 사랑하셨던 김대건 신부님의 삶의 정신을 배우는 데에서 그치지는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스스로 가져봅니다. 이 사랑의 정신은 배우고 깨우쳐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이어야 하겠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로 인해 흔들리거나 혼란해질 때 다시 이 근본으로 돌아와 생기를 갖출 수 있게 되기를. 다른 것에 한눈팔지 않으며 임자이신 그분 앞에 여문 사람이 되어가기를.
순교자들을 기리는 한 달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많은 순교 성인 복자들이 남기신 순교의 열매를 받아 누리시기를 기원하며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