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부활성야 미사에 가족들과 참례했을 때, 그 시작과 함께 성당의 모든 불이 꺼지고 아무 것도 안보이지만 성전 뒤편을 향해 돌아서면 그 길지 않은 침묵의 시간이 저에게는 긴장이었습니다. 왜 불을 다 끄고 어둡게 있어야 하는지, 잘 보이지 않는 유일한 불빛이 있는 그 공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하나도 모르지만 막연한 긴장감과 설레임이 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신부님의 기도가 몇 차례 이어지더니 불꽃이 피어오르고 그 불꽃은 제 키만 한 초에 옮겨 붙어 높게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초에서부터 작은 불꽃들이 내려와 저마다의 손 안으로 넓게 퍼지면, 이제 더 이상 어둡지 않고 성당 안이 환하게 비추어지던 그 장면이 참 멋있었습니다. 어린 저에게는 참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어둠을 비추어 죄와 죽음을 이기는 참 빛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이 파스카 성야 미사 안에서의 ‘빛의 예식’이지요. 총 4부로 이루어지는 전례 안에서 부활사건을 상징하는 ‘파스카 초’에 환히 불을 밝혀 어둠 속에 빛나도록 하는 핵심 예식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새로 축복한 불에서 파스카 초에 불을 댕기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님 이 빛으로 저희 마음과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저에게 있어 이 기도는 마음 깊이 바라는 저의 지향과 아주 일치합니다. 그야말로 내면의 어둠이 이 참 빛으로 비추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올 부활절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떠하실지요.... 해마다 사순 버튼을 누르면 40일간 무거워졌다가 부활 버튼을 누르면 기쁨의 분위기로 당연스럽게 바뀌었다 사그라드는, 지나가는 시간의 조각이 되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각자 처해있는 현실 상황 안에서 안고 가야 하는 여러 크고 작은 어려움들의 무게감으로 인해, 혹은 벗어날 수 없는 악습의 굴레로 인해, 또는 자신의 부족함이 크기에 빛으로 조명(照明)받아 정화(淨化)로 나아가는 것이 버겁게만 느껴지기 때문에, ‘빛’ 밖에 서있는 것이 벌써 익숙한 것은 아닐까.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와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과 이토록 친밀한 생명의 결합”을 종종 망각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명백하게 거부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태도들은 매우 다양한 근원에서 비롯될 수 있다. 곧 세상의 불행에 대한 반발, 종교적인 무지나 무관심, 현세와 재물에 대한 근심, 신앙인들의 좋지 못한 표양, 종교에 대한 적대적 사조, 그리고 끝으로, 하느님이 두려워 몸을 숨기며, 그분의 부름을 듣고 달아나는, 죄인인 인간의 태도 등이다. 비록 인간은 하느님을 잊거나 거부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모든 이를 끊임없이 부르신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7.29.30항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간절한 초대」. 최종적인 한계마저 이기신 분이시기에 더 이상 진리와 행복으로의 손짓을 막아설 수 있는 것은 영원히 없음을 명확하게 선언하신 사건인 것이지요. 그러니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부활시기가 되셨으면 합니다. 성지 가족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의 축복을 전하며, 부활과 함께 찾아온 봄 기운이 가득한 성지에서 뵙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