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다.
죽음의 이유도 정확히 알고 있다. 예수님의 안타까운 희생을 통해 살고 있음을 감사히 여기며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지만 죽음으로 끝이었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믿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모습에 부활의 신비가 우리를 더 예수님과 가깝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 그 이후를 어떻게 알 수 있겠냐고,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라고 억지를 쓴다.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영혼도 사라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중요한 핵심은 부활이다.
사람이 죽어서 어떻게 부활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누구나 부활을 보장 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또 어떤 모습일 지도 모른다. 부활은 믿음에 관한 신비의 영역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우리들의 삶의 끝은 어떨까.
누구나 나이가 들면 죽게 된다. 아프거나 서서히 기능이 마비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잣대를 들이밀어 시시비비를 일일이 가려내 공개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이 판관을 흉내 내듯 옳은 것보다 나쁜 행위가 많았다며 혹은 다른 사람의 삶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며 십자가에 묶고 못을 박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부활은 죽어야만 이뤄진다는 것 보다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필요하다. 죽은 다음에 자신이 부활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따지기보다 현실의 삶에서 부활에 접근한다면 다른 삶을 펼칠 수 있다.
현재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면 예측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악인으로 살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망가트리거나 해를 주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부활을 꿈꿀 수는 없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있지만 스스로 성찰을 통해 잘못을 깨닫고 통회를 한다면 결과가 다를 것이다.
일상을 통해 너무나 익숙하게 행하는 악습이 누구나에게 생긴다. 스스로를 매일 단죄할 수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 어제의 잘못을 깨닫고 오늘은 반복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부활의 삶이 아닐까. 그래야 우리가 다시 태어나 새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