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지난 한 달은 봄 기운을 느끼기에는 조금 짧고 이른 듯했습니다. 따스함을 기대했던 마음과 달리 다시 내리고 쌓이는 눈을 보고 헛한 웃음을 짓기도 했고 작년에 피었던 꽃들이 겨우내 온전할까 살피려다 아직 채 녹지 않고 물이 흐르는 틈을 막고 있는 구석의 얼음덩어리들을 어찌해야 하나 살짝 걱정도 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춘분을 훌쩍 지나 사순의 깊은 곳에 다다랐습니다. 사순시기를 맞아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에 방문하는 교우들께 시간은 금방 흘러가니 이번 부활이 의미있기 위하여 한눈팔지 않고 십자가의 삶에 집중하자 힘주어 매일같이 말씀드렸는데, 역시 성주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저의 모습도 그저 지난 삶의 흔적처럼 흩어져 버린 것 같아 심히 아쉽습니다.
바로 그런 아쉬움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의도치 않은 시련들이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찾아 올 때에, 아마도 우리들은 하느님을 열심히도 부여잡으며 어떻게든 이겨내려는 내적 노력들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치지 않고 나를 찾아오는 막연한 개운치 않은 심정들은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내적인 찝찝함이랄까, 뭔지 모를 죄책감들이 우리를 옭아매게 되면 그 무거움으로 인해 엉뚱한 것에 정신을 팔거나 상대에 대한 짜증 섞인 적대감을 드러내거나(물론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하는 경우들도 생겨납니다. 그럴 때에 스스로 성찰하며 던져보게 되는 질문, 지금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무거움은 무엇일까?
우리들은 내적인 무거움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익숙하지 않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삶의 무거움은 대단히 부정적인 요소로서 인식하고 있고 또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짊어지게 되는 문제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어쩌면 해결되지 않는 난제일 수도 있고 연이어 나타나는 없어지지 않는 듯한 인생의 꼬리표로 여겨지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대부분이 한숨짓게 만드는 일들이고 피하고 싶어지는 좋지 않은 일들이기에 아마도 두 팔로 안고 가는 것에 누구나 꺼려할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 신앙이라는 것은 어디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그 가운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을까요?
신앙은 희망이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증명한 것이 바로 오늘도 이어지고 있는 교회의 역사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 달려 있는 희망은 성모님과 많은 성경의 인물들, 그리고 순교자들을 비롯한 모든 성인들이 증거하였고 그것은 바로 그들 현실 삶의 문제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다시 기억합니다. 삶의 문제들과 그 무게는 우리 각자의 몸과 마음 그 총체에 스며들어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분의 현존은, 보이지 않기에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서서히 드러나 그 실체를 명확히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전히 그분의 방식으로 조금씩 깨달아갈 뿐입니다. 그렇게 삶의 무게를 피하려고만 하지 않고 그분의 길로 접어들어 일치시켜 가는 것에 내적인 초점을 맞추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희망을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의 여정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겠습니다.
봄 기운만을 찾다, 무거워만 보였던 눈이 어느새 비처럼 녹아 땅 속 깊이 스며들어 그 촉촉함이 기분 좋음을 느꼈습니다.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기에 지나쳐 그새 또 까먹었던 하나를 다시 가져와 기억하며 부활을 준비해봅니다. 모든 분들에게 부활 인사를 전하며, 무엇보다 기쁘고 행복하게 희망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