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추위가 조금은 물러났는지 제법 봄을 닮은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이대로 개나리가 피어오르고 푸른 기운이 기지개를 펼지, 아니면 우리들의 삶에서
수시로 달려드는 찬바람이 휘몰아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따뜻한 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 뿐.
누구나에게 십자가는 있다. 나무소재든 철강소재든 자신이 짊어져야 할 몫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묵주기도의 고통의 신비 5단을 바칠 때마다 가슴이 아리는 느낌이 생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애먼 예수님이 우리들을 대신해 총도 아니고, 교수형도 아닌 십자가 위에서 매달려 참혹한 모습으로 돌아가시게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 누구에게나 있는 십자가를 회피했거나 던져버려서 그랬을 것이다. 자신에게 내려진 십자가가 새털처럼 가볍지 않을 것이고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 즉 버거운 것은 분명하며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된다는 생각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눈치가 빠른 사람일수록 재빠르게 피하거나 숨어버릴 것이며 아예 나의 것이 아닌 양 모르는 척하는게 본능일 것이다.
프랑스로 유학중이던 어떤 신부님의 글을 읽었었다. 신부님은 동료신부님들과 루르드를 방문했다고 한다. 험한 길을 가고 있는데 중년의 프랑스부부와 맞닥트렸다. 그 부부는 고르지 않은 길 위에 휠체어를 힘들게 끌면서 가고 있어 동료신부님과 도와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휠체어에 앉은 중증장애를 가진 사람이 한국인이었다. 중년부부는 한국에서 입양을 했으며 장애가 있어 아무도 입양을 하지 않아 자신들이 선택을 했다며 밝게 웃었다. 우리나라가 짊어졌더라면 그 멀리에 사는 부부가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순간 스며드는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다는 신부님의 글에 가슴이 찡했다.
십자가는 고통이고 피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버린 십자가가 누군가의 십자가가 되어 대신 짊어질 뿐이다. 버겁고 힘든 나의 십자가는 자신이 감당할 몫이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과정을 겪어야함이 아닐까. 고통과 버거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중에 만나는 성취, 기쁨, 사랑, 존중, 타인의 고통을 나누는 배려를 거쳐 하느님을 떳떳하게 올려다 볼 수 있는 용기가 한층 깊어진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다가오는 사순시기에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지를 찾고 성찰하는 계기로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