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록>의 장주기 요셉 성인 증언1
찬미예수님!
고마우신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 그리고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음력 설을 쇠고 새해를 또 새롭게 맞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를 따르고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비록 코로나로 인해 가족들이 모두 모이지 못한 명절이었지만 소중한 전통을 지키고 삶으로 살아가는 후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유산도 소중히 발굴하고 지키며 삶으로 옮기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번 달에는 지난 달에 이어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록> 의 1차 교구 재판에서 14명의 증인들의 증언을 차례로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박순집 베드로의 증언 :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록 1>, 21회차, 1899년 8월 4일.
장낙소(장주기)요셉 회장에 대한 문목
제11조목대로 물은 즉, 답왈 : 장(주기) 회장(이) 태중 교우(胎中敎友)란 말만 듣고 다른 사정은 모릅니다.
제12조목대로 물은 즉, 답왈 : 신(푸르티에)신부와 박(프티니콜라) 신부와 한가지로 잡혔더니 양위(兩位) 신부는 바로 서울로 올라오시고, 장(주기) 회장은 먼저 충청도 감영(監營)으로 갔다가 안(다블뤼) 주교와 같이 서울로 올라오는데 올라올 때에 죄인(박순집 베드로)이 만나보았습니다마는 이미 신부께 그 사정을 품(稟: 아룀)하였사오니 <회차 16에서> 다시 말할 것 없습니다.
제13조목대로 물은 즉, 답왈 : 장(주기) 회장이 좌포청(左捕廳)에 가 갇혀 있은 줄은 아오나 다른 사정은 모릅니다.
제14, 15, 16, 17, 18, 19조목대로 물은 즉 자기는 전해들은 바가 없다고 답했다.
제20조목대로 물은 즉, 답왈 : 고마 수영(水營)에 가서 참수 치명(斬首致命)하였단 말만 듣고 다른 사정은 모릅니다.
제21조목대로 물은 즉, 자기는 전해들은 바가 없다고 답했다.
2. 김흥민 사도 요한의 증언 :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록 1>, 40회차, 1899년 12월 5일.'
제20조목대로 물은 즉, 답왈 : 안(다블뤼)주교 치명 후에 그 치명 이야기를 어느 교우에게 들은 즉 그 사람의 본명은 모르나 성명은 김선오인데, 그 사람이 안(다블뤼)주교 시체를 거두었사오나 치명시에는 친히 보았는지 일정치 못하나 내 소견에는 친히 본 사람인 듯하옵니다. 그 사람의 말이 안(다블뤼)주교가 고마수영에 가서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낙소와 한가(지)로 참수치명하셨단 말만 하옵더이다.
제21조목대로 물은 즉, 답왈 : 아까 말하던 김선오가 죄인에게 와(서) 왈 “안(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와 장(주기) 회장 세 사람의 시체를 자기와 다른 교우 하나와 같이 거두어 어디다 묻었다가 그 후에 옮겨 덕산 땅 뉘 밭 가운데 큰 바위 밑에 무덤 모양 아주 없이 묻었으나, 나와 같이 한 사람은 귀양가고 없고 나 혼자 남아 있어 그 무덤을 찾겠다” 하기에, 그 연유를 김(로베르)신부께 품하고 그 사람의 성명을 일러 드렸더니 그 후에 말 들은 즉 어떻게 그 시체를 안배하여 일본 갖다 두었단 말을 들었삽고 다시는 모릅니다.
3. 김천여 실베스텔의 증언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 1>, 43회차, 1899년 12월 25일
17(장주기 요셉회장의 재판 고유번호) 장(주기) 요셉 낙소가 본디 배론 회장이더니 그 때에 포교가 와서 문왈 “양인(서양인) 사는 집 주인이 누구냐?” 하며, 집 주인은 본래 이 베난시오더니 (이) 베난시오는 어디 출타하여 없는 고로 장(주기) 회장이 나서서 대답하되 “집주인이 내로라” 한 즉, 포교에게 잡혀갔다가 그 후에 안(다블뤼) 주교와 같이 고마 수영에 가서 치명 잘 하였단 말만 들었습니다.
위 증언들을 통해 장주기 요셉 회장은 태중 교우였고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될 때 같이 잡혔다가 따로 충청도 감영에 있은 후 안(다블뤼) 주교와 같이 서울로 올라와 서울의 좌포청에 갇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 증언자 모두 장주기 요셉이 고마 수영에서 참수치명하였다고 공통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치명당시의 상황을 본 듯한 김선오라는 사람도 이를 증언했고, 김선오는 안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와 장주기 요셉의 시신을 다른 교우와 같이 거두어 묻었다가 무덤을 찾으려고 했던 일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시신들은 일본으로 옮겨질 수 있었습니다. 체포 당시 배론의 회장이었던 장주기 요셉은 서양인 사는 집 주인이 누구냐는 포교의 말에 자신이라고 당당히 말하였습니다. 순교자들과 이들의 시신을 잘 안배하려 했던 교우들과 교회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