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늘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25년 새해가 밝고 이 회보를 받아보실 때쯤이면 설 명절을 지내셨을 것입니다. 또 교회에서는 25년마다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희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올 한 해 어떻게 지내야 주님의 은총과 축복을 잘 받을 수 있을까요. 지난 연중 제2주일의 복음 말씀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흥겨운 혼인 잔치에 필수적인 포도주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리십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상황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누구보다도 성모님께서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주님께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께 먼저 의탁하고 우리의 처지를 전구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시며 당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으셨음을 언급하십니다. 여기서 ‘때’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순간을 말합니다. 결정적으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시간을 말하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서 영광스럽게 드러나실 것입니다. 그때가 아직 아니기에 성모님의 도움 요청에 예수님은 신중하십니다.
그러자 성모님의 다음 말씀이 우리가 얻을 답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성모님은 거듭 당신의 요구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꾼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시는 때를 당신이 이래라저래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사람들이 쉽게 하느님의 힘을 이리 내십시오, 저리 내십시오 하고 원하는 것과 달리 전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에게 맡깁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을 모두 접고 오직 예수님의 뜻만을 쫓기로 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했던 자신의 요구를 접고 ‘그가 시키는 대로’하라고 주도권을 예수님께 돌려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행동하십니다. 성모님의 자세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얼마나 많이 나의 종으로 부리려고만 했지 정작 주인, 주님으로 모시고 그 뜻을 따르는 데에는 얼마나 인색했는지 모릅니다.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실 때와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따르시어 예수님을 잉태하셨듯이 이번에도 예수님 당신의 뜻을 펼치시라고, 시키시라고 겸허한 자세를 취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자세요, 우리가 그 은총의 빛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일꾼들에게 물독 여섯 개에 물을 채우라고 명하십니다. 물은 맛 좋은 포도주로 변했고 자칫 흥이 깨질 뻔한 혼인 잔치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어려움을 전구 해주시는 성모님의 청이 이루어졌고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은총과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새해 주님의 은총과 복을 받는 방법은 성모님께 의탁하기와 그저 당신은 시키시는 분으로서 우리는 하느님을 완전하고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렇게 모시는 것입니다.
지난달에 이어 마지막으로 기해박해의 의미를 말씀드립니다. 기해박해는 신유박해보다 체포된 신자 수는 적었으나 그 대상 지역은 더 넓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박해 이전에 이미 신자들이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 등지에 넓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울과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탄생했지만, 강원도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1백 명 이상의 신자들이 체포되었습니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기>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사나 장사 또는 병사한 신자 수가 60명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지도층인 선교사들과 지도자 신자들을 잃음으로써 교회는 일시 침체에 빠지게 되었고 신앙 공동체는 더 가난한 서민층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중으로 피신하거나 신자임을 감추고 생활해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신자들이 현실을 외면하는 경향이 짙어지게 되었습니다. 교회 서적이 부족하게 되면서 후세나 이웃에게 구전으로 교리를 전수해야 했으므로 어린이나 예비 신자들은 깊은 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기해박해는 처음 시작과는 달리 박해가 진행되면서는 정치적인 갈등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신유박해 때와 달리 신자들 가운데는 정치적으로 보복을 받을 만한 인물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는 박해를 강력히 주장하던 풍양 조씨 외는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거나 앞장서서 이를 주장한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순교자들중 1925년 7월 5일 복자품에 올라간 복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 1839년을 전후하여 순교한 복자는 선교사가 3명, 남자가 24명, 여자가 43명으로 모두 70명이었습니다. 이상으로 기해박해를 마칩니다. 기해박해의 순교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