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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당리성지 신부님 글

기해박해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10-01 조회수 : 9

찬미예수님!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늦더위로 단풍이 늦게 들은 가을입니다. 이제야 제법 단풍이 들면서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회보를 보시는 때는 11월, 위령성월이 되실 것입니다. 위령성월은 998년에 클뤼니 수도원의 5대 원장이었던 오딜로가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지내도록 수도자들에게 명한 것이 널리 퍼짐으로써 11월 한 달 동안 위령기도가 많이 바쳐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11월이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 성월로 정해졌는데, 한국 교회 역시 이러한 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을 떠난 부모나 친지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을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자신의 죽음도 묵상해 보는 특별한 신심의 달입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이 기도가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교회의 전통 교리가 위령 성월을 지낼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시간은 무의미합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도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이며 살아 있는 이들도 이 공동체의 동일한 구성원입니다.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는 유대감 안에서 죽음으로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할 수 있고, 반대로 하느님 나라에 이미 들어간 성인들도 이 세상의 살아 있는 우리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산 이와 죽은 이의 통교가 가능하므로 위령 기도는 가능하며 위령성월도 의미 있는 것입니다. 이 위령성월에 돌아가신 이들을 위해 기도를 바쳐 드리고 우리도 성인들의 기도를 받으며 하느님 안에 한 가족임을 확인하는 시간 되셨으면 합니다. 

  지난 달에 이어 기해박해에 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의정인 이지연이 천주교 박해를 허락받기 위해 대왕대비 순원왕후에게 올린 내용을 보면, 천주교인은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역적 무리이니 좌우 포도청에 하명하여 조사와 기찰을 강화토록 하고, 형조 판서는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뉘우치지 않는 자를 처형할 것이며, 서울과 지방에 다시 오가작통의 법을 시행하여 빠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왕대비전에서 내린 토치령은 이보다 더욱 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투옥되어 있던 신자들은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3일까지 새로 체포된 신자는 한 명도 없었는데, 이날 사헌부 집의 정기화는 ‘만일 원흉을 잡지 못하면 천주교 근절을 기할 수 없다’는 요지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경기도 고양의 용머리에서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녜스 자매가 체포되었습니다. 

  한편 형조 판서의 5월 3일자 보고에 의하면,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 신자가 도합 43명인데 그간 15명이 배교하여 석방되었다고 하였으며, 동월 11일자 보고에 의하면, 나머지 28명 중 11명이 배교하여 곧 석방될 예정이라 하였습니다. 이들 중 5월 24일 사형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사람들은 남명혁, 이광헌, 박아기, 박희순과 이미 1836년에 체포되어 오랫동안 옥중에서 고난을 겪어 오던 이소사 아가다, 김업이 막달레나, 한아기 바르바라, 김아기 아가다 등 모두 9명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2대 대목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는 3일 뒤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5월 26일에는 한강변 서강에서 살다 체포된 장성집 요셉이 장사(杖死)로 옥중에서 순교하였고, 다음날에는 14살 된 어린 동정녀 이 바르바라가 포청의 옥에서 굶주림과 열병으로 옥사하였으며, 같은 무렵에 김 바르바라와 정 아가다도 신앙을 지키다가 형조에서 옥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는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대구 옥에 갇혀 있던 박사의 안드레아, 이재행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와 전주 옥에 갇혀 있던 신태보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이일언 욥, 정태봉 바오로, 김대권 베드로 등에게도 각각 5월 26일과 5월 29일에 참수형을 집행하도록 하였습니다. 

  박해는 5월 말부터 일단 누그러져 약 1개월 동안은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그 동안 앵베르 주교는 서울을 떠나 손경서 안드레아가 마련해 놓은 경기도의 피신처(현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의 상게 마을 - 용소리는 요당리 성지가 있는 요당리와 가까운 곳으로 성지에서는 그래서 앵베르 주교와 주교의 피신을 도왔던 정화경 안드레아 성인과 손경서 안드레아 순교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로 갔고, 당시 조선에 있었던 다른 두 명의 성직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지방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세도가 조만영을 위시한 풍양 조씨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7월 5일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다시 상황이 바뀌어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배교자인 김순성(일명 여상)이 밀고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의 밀고로 며칠 사이에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 가롤로,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조신철 가롤로, 정하상 바오로, 역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가 체포되었습니다. 이때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호교론서인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품안에 품고 있었는데, 그의 예상대로 이 글은 체포된 후 조정에 보고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깊어가는 가을 평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