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늘 감사와 사랑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 그리고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단풍도 제법 물들고 낙엽도 많이 떨어지는 깊어가는 가을을 보내고 계시겠네요.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생명의 순환과정이 아름답듯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순리에 잘 따를 때 우리도 아름다운 인생의 과정을 보낼 것입니다.
지난달 기해박해에 대해 연재하면서 말미에 정하상 바오로 성인께서 <상재상서 : 上宰相書 재상에게 올리는 글>을 지어 체포되실 때 품고 계셨다가 조정에 이 글이 보고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천주교를 변호하는 글인 <상재상서>를 읽고 한 학생은 이 글이 당시 천주교를 적대하던 조정의 인물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하고 작성했다기보다는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 결심한 정하상 성인이 순수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글이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적대자들에게 순진하게 변호하는 글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을 넘어서서 <상재상서>는 한 신앙인의 순수하고 위대한 신앙고백이었으며, 시대를 넘어 오늘날 참되고 순수한 신앙이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글이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을 진정으로 따르고 사랑한 순교자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그 모습을 증거로 남길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달에 이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하상의 체포 이후 1839년 7월 20일에는 형조에서 문초를 받아 오던 이광렬 요한, 김장금 안나, 김노사 로사, 원귀임 마리아 등과 언제나 신앙을 함께해 오던 이영희, 이매임, 김성임, 김누시아 등 8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상게 마을 피신처에서 신자들로부터 전해지는 모든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7월 하순 무렵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자신의 거처로 오도록 하여 앞으로의 할 일을 의논한 다음 다시 교우촌의 신자들을 찾아보도록 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배교자 김순성을 앞세운 포졸들은 수리산 교우촌으로 몰려가 최양업 토마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 이 에메렌시아 등 여러 교우들을 체포하였습니다. 김순성은 이어 간계를 써서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거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앵베르 주교는 자수하였고 스스로 포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이때가 8월 10일이었습니다. 앵베르 주교의 자수는 조정을 매우 놀라게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모방, 샤스탕 신부를 체포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8월 22일에는 이들을 잡기 위해 충청도에 오가작통법을 엄격히 적용하라는 훈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앵베르 주교는 교우들의 재난을 그치게 하려고 두 신부에게 쪽지를 보내어 자수를 권고하였고, 이에 따라 두 신부는 9월 6일 충청도 홍주에서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이에 앞서 그들은 로마의 포교성성(현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장관에게 보고서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교세가 신자수 약 1만명, 영세자 1,200명, 견진자 2,500명, 고해자 4,500명, 영성체자 4,000명, 혼배자 150명, 종부성사 60명, 예비신자 6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압송되어 오자, 앵베르 주교는 그들과 함께 포청에서 신문을 받은 다음 의금부에서 다시 여러 차례에 걸쳐 신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9월 21일(음 8월 14일)군문 효수의 판결을 받고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이들의 시신은 그 후 20일쯤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일단 노고산(老姑山, 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묻혔다가 1843년 박 바오로에 의해 삼성산(三聖山, 현 서울 관악구 신림동)으로 이장되었으며, 1901년 다시 명동성당 지하 묘지로 이장되었다가 시복에 앞서 1924년에 로마, 파리 등지로 보내졌습니다.
선교사들의 순교에 앞서 8월 말에는 한 안나와 김 바르바라, 김 루시아 등이 포청에서 옥사하였으며, 충청도 홍주에서도 유 바오로가 옥사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9월 4일에는 이미 순교자를 낸 집안이거나 신앙이 굳기로 유명한 박후재 요한, 박큰아기 마리아, 권희 바르바라, 이정희, 이연희 마리아, 김효주 등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을 처형한 뒤 조정에서는 나머지 신자들의 처형을 서둘렀습니다. 그 결과 2개월여를 갇혀 있던 정하상, 유진길 등이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9월 26일에는 조신철이 다른 8명의 신자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이때 순교한 사람들은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 김유리대 율리에타, 전경협 아가다, 박봉손 막달레나, 홍금주 뻬르뻬투아, 허계임, 김효임 등이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신문을 받는 자리에서 국적과 입국 목적을 명백히 밝힌 다음, 입국 시 의주로부터 조신철과 정하상의 인도를 받았고, 서울에서는 정하상의 집에 거처했다는 사실만을 자백하고, 그 밖의 신문에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유진길은 선교사가 천주교에 불가결하므로 조선에 모셔 왔으며, 이것은 교회와 관련되는 일이지 반역이 아니라 주장하고, 부귀공명을 위해 천주교를 믿은 것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은 교회법을 행하려는 절차였다고 하였습니다. 정하상도 <상재상서>에서 밝힌 대로, 사람은 만물의 조물주인 천주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천주는 모든 민족의 기원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는 외구(外寇:외적)를 불러 본국을 해치는 일 같은 것은 교회법에는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따뜻하고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