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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당리성지 신부님 글

찬미예수님!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6-01 조회수 : 42

늘 감사와 존경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러분은 화가 날 때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분노의 정의에 대한 천주교의 가르침을 보면, 주님께서 “살인하지 마라.”(마태 5,21)는 계명을 상기시키면서 마음의 평화를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살의를 품은 분노와 증오의 부도덕성을 고발하십니다. 분노는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의 악에 대해 복수하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악습을 교정하고 정의의 선을 보존하기 위해서” 보상을 부과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분노로 복수에 이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는 분노가 욕망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 욕망을 잘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지난달에 이어 병인박해에 대해 계속 보도로 하겠습니다.    

  신자들이 처형되는 상황 안에서 1868년 5월에는 충청도 덕산에서 굴총 사건 즉 일명 ‘남연군 묘 도굴 사건’ 또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라 불리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다시 한번 박해가 확대되었습니다. 1866년 조선 원정에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간 오페르트는 이후에도 계속 조선 원정을 노리던 중, 중국에 있던 페롱 신부와 조선 신자들로부터 “덕산 가야동(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그 부장품을 가지고 협상을 하면 통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오페르트는 독일인 뮐러를 선장으로 삼아 세 번째로 조선 원정에 나섰습니다. 이때 그 일행에는 페롱 신부, 상해 영사관 통역관 출신이자 후원자인 미국인 젠킨스, 안내를 맡은 최선일 등 조선 신자들이 끼어 있었습니다. 

  이들 일행은 1868년 5월 9일에 아산만과 구만포를 거쳐 덕산 관아를 습격한 뒤, 군기를 탈취하여 남연군 묘가 있는 덕산군 현내면 가야동(현 상가리의 가야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묘광이 견고한 탓에 도굴에는 실패하고, 5월 11일에는 아산만을 출발하여 이튿날 인천 영종도 부근에 머무르며 프랑스 제독 알르마뉴의 명의로 된 통상 교섭 서한을 영종 첨사 신효철에게 전하였습니다. 이때 대원군은 경기 감사 이의익을 통해 통상을 거부하고 오페르트 일행을 퇴각시키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오페르트 일행이 3차 원정 9일 만인 5월 18일에 상해로 물러감으로써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충격을 주었습니다. 젠킨스는 한 미국인에 의해 고발되었고, 페롱 신부는 프랑스로 소환되었다가 1870년에 인도의 퐁디셰리로 파견되었습니다. 특히 대원군은 이 사건을 빌미로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이미 체포되어 있던 신자들은 역률을 적용하여 처단하였고, 배교한 경우도 유배형에 처하였다. 이때 먼저 오페르트에게 협력한 손경노 요한, 이영중 등이 체포되어 보령 갈매못에서 효수형을 받았습니다. 

  이어 서울의 포도청과 각 도의 감영에 신자들을 수색, 체포하도록 하는 영이 내려졌습니다. 그 결과 우선 중국을 왕래했던 교회 밀사 장치선, 최인서, 김계교가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였고, 굴총 사건이 일어난 충청도 덕산과 해미 일대는 물론 서울의 포도청과 절두산, 경기도의 수원, 남한산성, 죽산, 남양, 충청도의 공주, 홍주, 충주, 청주, 전라도의 전주, 나주, 여산, 경상도의 대구, 울산, 진주, 황해도의 해주, 황주, 함경도의 영흥 등지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조정에서 내려진 명령은 주로 참수형이었지만, 지방에서는 주로 교수형이나 장살, 생매장 등 남형(濫刑 : 법에 의거하지 않고 함부로 형벌을 가함, 또는 그 형벌)을 적용하였습니다. 특히 생매장의 예는 충청도 순교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데, 수부인 공주에서는 행해지지 않고 지방인 홍주나 해미 진영에서만 적용되었습니다. 

  무진년의 박해는 1869년에 이어 1870년 말까지 계속되다가 잠잠해지게 되었으나, 1871년에 미국 함대가 내침하는 ‘신미양요’로 인해 다시 재개되었습니다. 이때 대원군은 5월 26일에 북경 주재 미국 공사 로오와 사령관 로저스가 이끄는 4척의 미국 함대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자 이를 물리쳤으며, 미국 함대가 강화도 광성진에서 중군 어재연 등을 살해하자 군사를 동원하여 함대를 격퇴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6월 12일 자로 명을 내려 서울의 종로와 8도 각 지역에 척화비를 건립하도록 하였고, 여기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오면 싸우거나 화친해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라는 글자를 새기도록 하여 척화사상을 고취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1871년과 1872년 사이에만 52명의 신자가 다시 포도청에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이 지방에서는 신자들이 체포되지 않았으며, 조야의 상소에 따라 1873년 12월 24일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병인박해는 끝을 맺었습니다. 

  한편 중국에 있던 칼레 신부와 리델 신부는 1867~1868년 사이에 다시 조선에 잠입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이에 리델 신부는 칼레 신부, 새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블랑 신부와 함께 1868년 말부터 만주 태장하 인근에 있는 차쿠에 머물면서 조선 입국을 계획하던 중 1869년에 제6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1876년 5월 8일에는 블랑신부와 드게트 신부를 황해도로 입국시켰으며, 이어 리델 주교 자신도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한 끝에 1877년 9월 23일에는 두세 신부, 로베르 신부와 함께 황해도로 입국하였습니다. 그러나 리델 주교는 1878년 1월 18일에 체포되어 6월 24일 중국으로 추방되었고, 1879년 5월 16일에는 드게트 신부도 체포되어 9월 7일에 중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이상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더운 여름 건강히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