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감사와 존경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5월 말이 되니 날씨도 점점 더워지는 것 같습니다.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비처럼 후덥지근한 마음에 한 줄기 비처럼 간단한 기도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이름들로 불리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호칭들을 집약하는 이름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 강생하실 때 받으신 이름, 곧 ‘예수’ 라는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인간의 입술에 담을 수 없지만, 하느님의 ‘말씀’ 은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그 이름을 건네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름을 ‘예수’, ‘야훼는 구원하신다’ 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666항 참조)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 것은 늘 기도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길입니다. 겸손되이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으로 자주 되풀이한다면, 이 기도는 “말을 많이 함”(마태 6,7)으로 흩어져 버리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간직하여 꾸준히 열매를 맺게 합니다.”(루카 8,15 참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어느 때라도’ 가능한 것이니 그것은 다른 일에 덧붙여서 하는 부수적인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단 하나의 중요한 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행동에 생명을 불어넣고 변화시키는 일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668항) 예수님의 이름을 겸손되이 불러 그 어느 때라도 가장 간단하게 자주 되풀이한다면 이것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기도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지난 달에 이어 병인박해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병인박해가 확대된 이유 중에 하나는 ‘병인양요’ 였습니다. 프랑스 함대가 직접 조선 해안을 위협하고 군인들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한 사건으로, 위정자의 적대감과 위기 의식을 불러 일으켜 박해를 부추기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앞서 중국으로 피신한 리델 신부는 그곳에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선교사 학살 소식을 전하여 보복을 결심하도록 하였습니다.
로즈는 조선에 원정하기 위해 9월 18일(음 8월 10일) 리델 신부를 통역으로, 최선일, 최인서, 심순여 등 세 명의 조선 신자를 안내인으로 삼아 세 척의 군함으로 체푸를 출발하였으며, 9월 26일에는 한강 입구를 거쳐 양화진과 서강까지 올라갔다가 체푸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병인양요인데, 이는 조선을 정찰할 목적에서 감행된 것이었습니다.
제2차 병인양요는 10월 11일 로즈가 일곱 척의 군함을 이끌고 10월 14일에 강화도 갑곶진을 거쳐 이튿날 강화읍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프랑스 병사들은 강화도에 있던 은괴와 많은 서적, 물품들을 노획하였으며, 로즈는 선교사 처벌에 대한 문책과 통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0월 26일과 11월 9일에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조선군에게 패하고 11월 21일 중국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이처럼 병인양요가 프랑스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어 1867년과 1868년 초까지 도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우선 11월 21일에 천주교 신자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내도록 전국에 명하였으며, 이틀 뒤인 11월 23일에는 성연순 등을 체포하여 강화도에서 교수형에 처하고 선참후계(先斬後啓, 먼저 형을 집행하고 보고는 나중에)의 영을 내렸습니다. 이에 앞서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렇게 대원군은 양화진에 새 형장을 만들어 무수한 신자들을 이곳에서 처형하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양화진은 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진 곳이라 하여 신자들 사이에서는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박해가 확대되면서 전라도에서는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원서(요셉), 이명서(베드로), 조화서(베드로), 정원지(베드로) 등이 체포되어 형벌과 문초를 받은 뒤 1866년 12월 13일에 서문 밖 장대(숲정이)에서 순교하였고, 조화서의 아들 조윤호(요셉)는 12월 18일 전주 서천교 장터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대구 관덕당에서는 1867년 1월 21일에 이윤일(요한)이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으며, 수원에서는 1867년 3월에 박의서(사바) 회장과 두 아우가 순교하였고, 충남 공주에서는 배문호(베드로), 최종여(라자로)가 1866년 12월 24일에, 서정직(요한)이 1867년 1월에 순교하는 등 1868년까지 공주, 해미, 홍주 등지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특히 서산 강당리에서는 김선양(요셉) 등 17명이 홍주로 끌려가 12월 27일에 교수형을 당하였고, 공주의 국실에서는 회장 김화숙(베드로)과 한 마을 신자 27명 가량이 함께 공주로 끌려가 1867년 4월에 두 차례에 걸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여기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랑스 함대가 침입한 병인양요는 조정이 천주교에 대한 적대심을 더욱 갖게 하는데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천주교 인들이 프랑스 함대를 끌여들였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 결과 박해는 더욱 심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