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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당리성지 신부님 글

찬미예수님!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4-01 조회수 : 25

늘 감사와 존경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봄이 깊어지면서 성지도 더욱 아름다워졌습니다. 색색의 연산홍둘이 꽃을 피워 성지를 아름답게 물들였습니다. 연산홍이 그간 만발하지 않아 아쉬움이 있었는데요, 올해는 작년보다 더 많이 꽃이 핀 것 같아 좋았습니다. 초록색 나무들과 어우러진 연산홍 꽃들을 보며 아름다운 마음으로 성지를 사랑해 주시는 후원회 여러분들과 순례자 여러분의 그 마음이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정성으로 성지는 잘 가꾸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달에는 지난 달에 이어 병인박해에 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원군과의 만남을 기다리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는 조정으로부터 소식이 없자 다시 지방 순회에 나섰습니다. 이때 베르뇌 주교는 서울 인근의 교우촌을 둘러보고는 다시 상경하였는데, 1866년 2월 23일(음 1월 9일) 포졸들이 몰려와 베르뇌 주교, 홍봉주, 하인 이선이를 체포하였습니다. 이어 2월 25일에서 3월 1일 사이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와 정의배 마르코,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등이 잇달아 체포되었고, 배교하고 석방되었던 우세영이 다시 마음을 고쳐 상경한 후에 자수하였습니다. 이들은 곧 포도청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여기에서 이선이가 남종삼을 밀고하자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한 뒤 함께 국문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3월 1일 남종삼이 경기도 고양에서 체포된 이튿날 국청(鞫廳)이 개설되었습니다.

  의금부에서는 여러 차례 신문과 형벌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판결이 내려져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등 4명은 3월 7일(음 1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으며, 남종삼과 홍봉주는 같은 날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습니다. 한편 조정에서는 이날부터 천주교 신자들과 서적을 색출해 내도록 전국에 명하였습니다. 3월 9일에는 최형과 전장운을 서소문 밖에서 처형하였고, 3월 11일에는 정의배, 우세영과 제천에서 체포되어 온 배론 신학교의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습니다.

  충청도에서는 3월 11일에 거더리(지금의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의 손 니콜라오 회장 집에 있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고, 이어서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 황석두 루가 등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여기에서 제천에서 체포되어 온 배론 성 요셉 신학교의 집주인 장주기 요셉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들 5명은 3월 30일에 보령의 갈매못(지금의 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같은 무렵 거더리에서는 손자선(토마스)가 체포되어 공주로 이송되었고,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고백한 뒤 3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았습니다. 

  한편 공주 진밭(현 공주군 사곡면 신영리)에 거처를 두고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던 리델 신부는 박해 소식을 듣고 3월 6일에 경상도를 떠나 진밭, 버시니 등지에서 피신 생활을 하다가 5월 18일에 페롱 신부를 만났습니다. 당시 칼래 신부는 박해 소식을 듣고는 공소 순방을 중단하고 경산도 문경의 한실, 진천의 삼박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을 거쳐 목천 소학골(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fh 피신해 있다가 후에 페롱, 리델 신부와 상봉하였습니다. 이어 리델 신부는 장상인 페롱 신부의 지시에 따라 7월 1일에 장치선, 최선일 등의 안내로 용당리(아산군 선장면 가산리)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탈출하였습니다. 그 후 페롱 신부와 칼래 신부도 10월 11일경에 중국으로 탈출하였습니다. 

  이후 박해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10월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등지의 감영이나 진영이 있는 곳에서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포졸들이 배교자를 앞세우고 각처의 교우촌을 약탈하거나 유린하였습니다. 이처럼 박해가 확대된 데에는 서양 선박의 내침에도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1866년 4월과 8월에 유대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영국 상선을 타고 두 차례나 아산만에 나타나 상륙을 시도하려다 좌절된 일이었습니다. 특히 오페르트는 두 번째 내침시에 아산만 상륙이 좌절되자 강화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둘째로 6월에는 미국 상선 서프라이스 호가 평안도 해안에 접근한 적이 있었고, 이어 9월 2일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 하구에 닻을 내리고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감사 박규수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소각되었습니다. 이때 조정에서는 9월 12일자로 예문관 제학 신석희가 지은 <병인척사윤음>(丙寅斥邪綸音)을 조야에 반포하였습니다. 세 번째 사건은 바로 프랑스 함대가 두 번에 걸쳐 조선원정에 나선 ‘병인양요’ 였습니다. 

  여기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기로 결정하고 나서 베르뇌 주교님과 다블뤼 주교님을 비롯한 여러 신부님들과 신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리델, 페롱, 칼래 신부님은 중국으로 탈출하였습니다. 안타깝게 전국적으로 감영과 진영에서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각처의 교우촌들이 약탈당하는 불행을 겪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박해가 더욱 확대되는 원인들이 생겨 박해에 기름을 붓게 되었는데 오페르트의 내침과 미국 배들의 접근과 충돌, 무엇보다 프랑스 함대와의 직접적인 전투였던 ‘병인양요’ 가 그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