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근성지 후원 가족 모두에게 7월 인사 올립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하시고 영, 육 간에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 서술자 ‘나’가 이렇게 말합니다.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처음에는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하지만 점차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통제에 중독당한 것처럼 평온한 생활에 순응하게 됩니다.” 이것을 바로 ‘제도화 증후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제도가 강력하고 집이 아무리 빈틈없이 막혀 있어도 날아오르겠다는 꿈만 있으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엔디’가 27년간 작은 망치 하나로 밖으로 탈출할 통로를 뚫은 것처럼 말입니다. 엔디는 왜 그렇게 밖으로 나가겠다는 집념을 포기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제도화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옥이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가고 싶은 곳도 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아름다운 국경 마을 ‘제후아테네호’ 였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는 자유롭고 천진난만 하지만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각종 규칙을 지키며 조심스러워지고 운신의 폭도 줄어듭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고정 관념, 상식, 숨김, 당연시하는 마음 등으로 만들어진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옥에 안주하며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노인들은 은퇴한 뒤에 할 일이 없이 빈둥거리게 될까 봐 은퇴를 두려워합니다. 매일 아침 7시에 기상해 저녁 6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버릇으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무미건조한 일상과 틀에 박힌 업무, 심지어 걸음걸이와 표정까지도 이미 습관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감추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임제 선사는 너 자신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에게는 누구나 충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과 기쁨, 상상, 창조의 충동을 잠재의식 속에 억눌려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단조로운 인생을 원치 않는다면 일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익숙하게 당연하게 보이는 규정과 법칙을 뛰어넘고, 마음속에서 화석처럼 굳어진 생각을 훌훌 던져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삶을 대하는 방식을 변화 시켜야 합니다. 아주 잠깐이라도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들여다본다면 인생의 톱니바퀴가 녹슬지 않고 언제나 생기 넘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번쯤 꼭 해 볼만한 인생의 모험입니다. 궤도를 벗어나 잠시만이라도 생명의 오묘함과 무한함을 깨닫고 이 세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충동적으로 흥이 돋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성을 앞세워 이리 재고 저리 재며 망설입니다. 이렇게 하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안돼, 안 돼, 너무 늦었어... 하며 내일 가자 등등 말을 합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생명의 충동들이 우물쭈물 하는 사이 연기처럼 흩어져 버립니다. 이 충동은 한 인간의 최대 즐거움이자 진정한 자기의 모습 인데도 이를 억압하며 거부합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모든 열정과 흥미를 잃어버린 제도화 된 로봇으로 살게 됩니다. 흥미를 잃는다는 것은 삶 전체가 암흑의 심연에 빠진 것 같아서 미친 듯이 거리를 내달리다가 머리에 피가 흐르는지 확인하겠다며 벽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과 같습니다.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조로운 인생을 원치 않는다면 지금껏 살아왔던 일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삶을 대하는 방식을 변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저도 언젠가는 양강섬과 산책로를 반바지 차림으로, 웃옷을 벗고 남들 의식하지 않으며 마음껏 달려 보고 싶습니다.
충동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생명을 위하고, 창조적인 충동은 진정한 나로서 살게 해 주는 하느님의 큰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결코 외면하지 마십시오.
어수선한 인생길에서 우리는 잡다한 일상에 너무 많이 얽매여 살고 있습니다. 사소한 다툼, 유언비어 등에 연연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일분일초를 헛되이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상사에게 무시당하거나 동료가 자신보다 더 빨리 승진하고 연봉이 오르면 심란해집니다.
날마다 이러한 잡다한 일들 때문에 분주히 뛰어다니며 일희일비한다면, 그 인생은 작은 병 속에 갇힌 지렁이들처럼 비좁은 공간에서 서로 얽히고 설켜 다투는 격입니다. 병 밖의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입니다. 돈과 명예에만 관심을 쏟으면 인생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 노예처럼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야 합니다.
공자는 끊임없이 좌절하고 조롱당하고 오해받으면서도 여전히 자기만의 즐거움을 잃지 않았던 것은 세상을 초월해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그가 자신의 주인이므로 속세의 영욕과 빈부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영혼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공자는 집중하면 먹고 마시는 것도, 걱정 근심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잡다한 일은 다 잊었으므로 그의 생각은 구속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진정한 안락함을 느꼈으므로 시간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그래서 나이든, 노화든 그에게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진정으로 속해있는 것을 찾고 나면 집중할 수 있고,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습니다. 몰두할 수 있는 취미가 있으면 생활의 고단함도 견딜 수 있고 죽음이 다가와도 두려움이나 공허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취미는 신앙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으로 인간 삶을 초월하며, 인간 본연의 자태를 유지한다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을 초월한다는 것은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삶에 집착하지 않는 것 입니다.
2024년 7월 자기답다는 것에 대하여
양근성지 전담 권일수 요셉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