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하느님!
봄 인지 여름인지 잘 모를 정도로 날씨의 변덕이 심한 요즈음입니다. 그래도 송화가루와 버드나무에서 눈처럼 날리던 씨앗들이 사라져 그래도 숨쉬기 편한 오늘입니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청명합니다.
11시 미사가 끝났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주제로 강론을 했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보내면서 우리 모든 인간은 육체, 생각, 감정이 아닌 영임을 깨닫습니다. ‘영’으로서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이고, 영은 하느님의 작용으로 주시자 혹은 목격자이며 내 안의 또 다른 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요한 16장 28절)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에게서 나왔고, 이 세상 삶을 살다가 다시 하느님께 가는 존재인 것 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통해 이 세상에 온 우리는 하느님을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어머니가 우리를 낳고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고, 순결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지난 5월 한 달 개신교 신자이며 서강대학교 종교학 교수님이셨던 길희성 작가의 ‘종교와 영성 연구’ 전집을 읽어 보았습니다. 길희성 교수님은 철학 신학, 종교학적으로 공부를 아주 많이 하신 분입니다. 그 중 ‘종교 10강’ , ‘종교에서 영성으로’,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보살 예수’, ‘신앙과 이성의 새로운 화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사상’ 등은 꽤 괜찮았습니다. 특히 개신교 신학을 전공하고 가톨릭, 그것도 중세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님의 영성을 소개하는 것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신학생 시절부터 좋아했던 분입니다. 중세 12세기 그의 사상이 한때 그가 죽은 후 종교재판소에 의해 파문을 당했지만 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다시, 복권이 되었습니다.
에크하르트는 신과 신성을 구분합니다. 신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으로서 이런저런 속성을 지닌 신이지만 신성은 일체의 속성을 떠난 하느님, 삼위의 옷마저 벗어버린 신의 벌거벗은 본질이며, 신의 근저입니다. 에크하르트 신비주의의 핵심은 이 하느님의 근저와 인간 영혼의 근저가 지성에서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일치는 불성과 마찬가지로 번뇌와 더러움으로 숨겨져 있지만 수행을 통해 완전하게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수행의 요체는 일체의 욕망과 집착, 모든 관념과 심상, 심지어 신에 대한 관념이나 집착까지 끊고 떠나는 철저한 초탈이라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조금 쉽게 말하자면 모든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지성으로 하느님과 하나 되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집착과 애착을 끊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지성 개념은 불교의 공과 무 사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에크하르트의 책을 보면서 중세 12세기에 너무도 멋진 하느님 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많이 놀랐습니다. 양근 성지 후원 가족들도 지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강력하게 추천을 합니다.
사제로 사는 것은, 밖에서 보면 한없이 편안해 보이지만 막상 사제로 사는 신부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매일 강론을 하며 대중을 상대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과업입니다. 물론 저도 28년간 함께하는 지병이 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오늘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사제로서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은 일하고, 기도하고, 운동하고,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자랑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건강한 사제로 살기 위해서는 약간의 노동, 기도, 운동, 공부는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 운이 좋은 신부입니다. 아름다운 성지에 살면서 머리가 혼탁할 때는 마당쇠처럼 두세 시간 정도 ‘순교자광장’에서 청소(비질)를 하면 참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보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어서 좋고, 어느 날은 아름다운 남한강 변을 산책하며 기도하고, 강물을 보면서 멍 때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오늘날 신부님들도 그렇고 신자분들도 그렇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혼란하고 힘이든 이유는 지나친 세속화로 인한 영성의 부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히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사상으로 과학과 이성의 대두로 현대인들은 아버지 하느님을 잃고 교회를 멀리하고, 기도하지 않으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편안하지 못하고 병이 들게 된 것입니다.
신앙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고, 과학과 신앙 또한 별개가 아닌 잘 어울리는 환상의 조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에 의한 물리학의 발전과 오늘날 대두되는 양자 물리학은 신앙과 과학이 별개가 아님을 알게 해줍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을 내면에 모시고 살아가는 영적 인간입니다. 영적 인간은 다름 아닌 하느님과 하나 됨을 추구하며,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몸소 실행에 옮기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를 놓치지 않는다면 영적 인간으로서 외면과 내면이 참 조화를 이루신 예수님처럼 온전한 영적 인간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2024년 6월 영적 인간의 삶을 꿈꾸며
양근성지 전담 권일수 요셉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