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한국천주교회는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해 기도하며 애쓰고 있습니다. 그 절차가 이미 2001년에 시작되었고 지금에 이르도록 우리 한국교회의 큰 과업으로 남아있는 것이지요.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3월 회보 ‘시복시성을 청하며’ 참조.), 신앙의 선조들을 복자와 성인의 품에 올리는 것은 그분들을 위한 일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들을 위한 일이 됨을 다시 한 번 기억해봅니다. 우리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과 같은 대표적인 신앙의 영웅들을 시복시성함으로써 우리가 현세의 삶에서 토마스 신부님을 닮은 하느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삶에서 배우고 그 영성을 따라가고자 노력하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 번째 사제. 그분을 가리켜 길 위의 목자요 땀의 증거자라고 합니다. 일생을 참으로 희생하며 살았던 참 목자와도 같았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1836년 12월 3일, 만 열다섯 살에서 열여섯 살로 넘어가는 시기에 1만 리 머나먼 길을 걸어서, 중국 대륙을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여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는 여정과, 1849년 말 13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뒤 해마다 7천 리 내외를 걸으며 11년 6개월 동안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을 순방한 사실은 그 자체로 놀랍고 경이롭습니다. 그 여정 길에 묻어있는 숱한 이야기들을 어찌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전해지는 기록 속에서나마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성모님께 대한 사랑이 깊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아직도 낙담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하느님의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 안에서 항상 영원히 희망을 가질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고 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겼으니, 그분을 언제나 믿을 것입니다.”(1847년 9월 20일자 서한)
언제나 신부님께서는 하느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시고 하느님의 섭리하심에 순종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풍성한 자비를 믿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뜻에 일치하고자 노력하셨던 목자로서의 마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성모신심과 각별히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험이 닥치거나 어려운 일에 처할 때에,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하심을 청하였습니다.
“주님, 보소서. 저희의 비탄을 보시고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소서. 저희의 죄악에서 얼굴을 돌리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에 눈길을 돌리시어, 당신을 향하여 부르짖는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1847년 9월 20일자 서한)
이러한 믿음과 교우들을 향한 희생의 삶을 사셨던 토마스 신부님께서 하느님 품 안에 마땅한 안식을 누리며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와 한국교회를 위하여 기도해주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하여 교회와 함께 우리가 특별한 전구 기도를 바치는 것을 교회는 독려합니다. 구체적인 사람의 치유를 지향으로 주모경, 묵주기도 등과 함께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시성 기도문’을 바치는 일입니다. 성지에도 방문하셔서 열심한 지향으로 기도하셔도 좋겠습니다. 좀 더 포근해진 성지에 많이 방문해주시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해 모두 함께 정성을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