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생기를 되찾을 새로운 한 달과 함께 예수님 부활의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유난히 짧게 느껴졌던 사순시기 동안 수난하시는 주님과 함께 하고자 애쓰셨던 만큼 올해 지내는 부활절도 새로운 의미로서 다가오는 날들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차갑기만 했던 계절을 지나 다시 포근하고 생명 넘치는 성지에서 많은 순례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성지 이곳 저곳을 살펴보고 돌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지 순례오시는 교우분들과 부활의 기쁨을 나눌 때를 기다리면서, 많은 후원회원분들도 풍요로운 부활시기 보내시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성지에서 맞이하는 부활은 해마다 차분하고 소박합니다. 본당에서 여러 교우 공동체와 함께하며 보다 화사하고 시끌벅적(?)한 ‘부활 대축일’ 과는 조금 다를 수밖에 없지요. 성주간과 부활 성야 전례도 작고 간소하게 이루어집니다. 한옥성당 내의 공간의 한계도 있지만 오히려 그 간소함이 전례의 의미를 더 새기게끔 해주기도 합니다. 매년 크게 많지 않은 신자들과 부활 전례를 봉헌하지만 그 숫자나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분하고 소박한 전례 안에서 온전히 주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마음에 열중할 수 있습니다. 올 성주간 전례도 그렇게 드렸습니다. 함께 참여하신 모든 교우분들도 역시 그러하셨기를 바랍니다.
성경 안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부활’이라는 사건을 묵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 수난 전 유다인들과의 대화(사순 5주간 복음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안에서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라고 하시자,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까?”(요한 8,33)라고 대답하며 등장합니다.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요한 8,39)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주장하며 예수님을 배척할 나름의 명분을 찾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조차 자신만의 우상(偶像)에 매어있기 쉬운 인간들에게 결정적인 말씀이 주어집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6.58)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심’(창세 22,8참조)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절망 한가운데에서 희망을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그 희망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문턱을 건너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성취된 희망과 같습니다. 곧, 아브라함이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서 오는 기쁨인 것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이나 눈에 보이는 것들, 그리고 자신만의 좁은 내적 생각들에만 묶여있을 때에는 유다인들처럼 어쩌면 돌을 들고 저항하려고만 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낳게 되지 않을까. 이미 현세를 살면서도 영원한 것을 향해 열려있었던, 그래서 물리적 시간이나 세월 또 인간의 나이 등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갔던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있어서 참된 생명을 누리는 길에 대해 잘 알려주는 듯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새롭게 주어지는 한 달,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영적 생명을 채워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부활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시고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모두 환절기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