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늘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24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로운 한 해가 밝았고 새로운 새해 결심 하시며 새해, 새날들을 잘 보내시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새해에는 건강을 위해 그동안 불어난 체중을 감량하고 근력증가를 위해 헬스 운동 PT를 시작했습니다. 헬스 트레이너의 조언과 격려와 지도를 받으며 평일에 매일 헬스장에 나가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운동하기가 왜 그리 어려웠는지 그간 운동을 안 하다가 열심히 하니까 확실히 다른 것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아직도 운동 나가는 것이 몸에 배지 않아 쉽지는 않지만 트레이너와의 약속이기에 억지로라도 나가야만 하는데 운동을 하고 나면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몸도 아직 느끼지는 못하지만 좋아지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흐뭇해집니다. 하루의 운동이 끝나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해냈다는 사실에 성취감도 느낍니다. 새해에 몸 건강관리 잘해서 성지사목에 뒷받침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후원회 여러분과 순례자 여러분도 새해 건강하세요.
지난달에 이어 앵베르 주교님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 사천에서 조선 서울로 입국에 성공하신 주교님은 먼저 입국하신 모방, 샤스탕 신부님과 함께 전교활동에 힘쓰셔서 1838년 말 9,000명으로 신자수가 늘어나는 성과를 거두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앵베르 주교님은 일상적인 사목 활동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신심을 함양하고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는 등 조선 교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주교님은 먼저 한국어로 된 기도서가 없는 것을 알고 한국어 기도서의 편찬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4명의 통역들을 데리고 기도문 번역에 착수하여 1838년경 <텬주 성교 공과>(天主聖敎功課)와 <텬주 성교 십이단>(天主聖敎十二端)을 완성하였습니다. 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매괴회(玫瑰會), 성의회(聖衣會) 등 신심 단체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종의 ‘성영회’ 활동도 전개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앵베르 주교님은 정하상, 이재의 토마스 등 네 사람을 신학생으로 뽑아 하루에 두 시간씩 라틴어를 가르쳤고, 얼마 뒤에는 그중 두 사람에게 신학을 가르침으로써 3년 안에 신품을 줄 계획도 갖고 있었습니다. 이외에 주교님은 일본의 류큐섬을 돌보기 위해 사천에서 데려온 회장을 보내려고 시도하였고, 박해의 조짐이 보이던 1838년 말부터는 <1839년 조선 서울의 박해 이야기>라는 박해 일기를 작성하여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이 일기는 앵베르 주교님의 체포 뒤, 정하상, 현경련 베네딕다, 이문우 요한을 거쳐 최영수 필립보, 현석문 가롤로, 이재의 등에 의해 <기해일기>로 완성되었습니다.
한편 1838년 말부터 서서히 나타나던 박해는 1839년 초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앵베르 주교님은 1월 25일 갓등이 공소에서 동소문 밖 신자들의 체포 소식을 듣고, 1월 30일 상경하여 박해가 확대되기 전에 서둘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조정에서는 4월 18일에 <사학 토치령>(邪學討治令)을 반포하였고, 5월 24일에는 남명혁 다미아노와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등 9명이 공식 처형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앵베르 주교는 6월 3일 손경서 안드레아와 정화경 안드레아가 마련한 피신처로 피신하였습니다. 요당리 성지가 그 피신처의 추정지 중 하나가 되겠습니다.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3명의 서양인 신부가 나라 안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무렵 배교자 김순성(요한, 일명 여상)은 정화경을 유인해 앵베르 주교님의 거처를 알아냈으며, 주교님은 거처가 알려졌음을 알고 8월 11일 자수하였습니다. 다음날 서울로 압송된 앵베르 주교님은 처음 좌포도청에 갇혀 심문을 받았으며, 이어 의금부로 넘겨져 문초를 당하였습니다. 의금부에서 4차례의 심문을 받은 앵베르 주교님은 혹독한 형벌과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신자들의 이름을 대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결과 군문 효수형을 선고받고 1839년 9월 21일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습니다. 주교님의 유해는 처형된 지 20여일 후에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지금의 서강대 자리)으로 옮겨졌으며, 1843년에는 삼성산(서울 관악구 신림동 산 57-1)으로,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10월 21일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다가, 그해 11월 2일 종현(현 명동) 대성당의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습니다. 1857년 9월 24일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고, 1925년 7월 5일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습니다.
주교님은 조선의 상황에 맞추어 사목활동을 행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신자들이 모국어로 된 기도문이 없어서 중국 한자음을 발음하여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한국어로 된 기도문을 만드셨습니다. 조선에서의 한국어 사용의 중요성을 인지하시고 당신 역시 조선어 공부를 열심히 하셨으며 사목활동에 한글의 중요성을 감안하시며 임하셨습니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조선어를 활용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사제서품에 있어서도 먼저 유학을 떠난 3명의 소년 신학생들과는 달리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정하상을 비롯한 다른 남성 신자들에게 교육 후 사제품을 주게 하려고 했던 것도 일반적이지 않은 지역 상황을 고려하여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