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늘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기쁜 성탄을 맞이하셨는지요. 다시 한 번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아기 예수님의 은총과 사랑과 평화가 후원회 여러분과 순례자 여러분께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특히 전쟁 중에 아기들과 아이들이 큰 피해를 입고 위험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멈추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이신 주님께서 이미 희생된 불쌍한 이들을 당신 품에 받아들여주시기를...
지난 달에는 정화경 성인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이번 달에는 정화경 성인이 피신을 도왔던 우리나라 두 번째 주교님이신 103위 성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난 달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교님께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박해를 피해 요당리 성지가 있는 지역으로 피신해 오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당리 성지는 앵베르 주교님도 같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앵베르 주교님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한국 선교사로 세례명은 라우렌시오이며 한국 이름은 범세형이었습니다. 축일은 9월 20일입니다.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액스 교구의 마리냔 본당 관할의 브리카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앵베르의 부모는 앵베르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의 라보리라는 곳으로 이사하였고, 앵베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앵베르는 이웃 할머니의 도움으로 읽고 쓰는 것을 배웠으며, 얼마 뒤에는 카브리에 본당의 아르노 신부와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807년경 그리스도교 은수회에서 운영하는 성 요아킴 기숙 학교에 들어갔고, 1812년는 액스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앵베르는 신학공부를 마쳤을 때에도 나이가 어려 과거 성직자가 되는 데 일정한 순서로 받게 되는 차부제품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2년 동안 가정교사를 하는 등 시간을 보내다가, 1818년 10월 8일 에그벨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원장에 의해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로 보내졌습니다. 앵베르는 그곳에서 이듬해 3월 27일에 차부제품을 받고, 이어 연령 제한에 대한 특별 관면을 받은 뒤, 그해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사제 서품 후 중국의 사천(四川) 선교사로 임명된 앵베르 신부는 다음해 3월 20일 파리를 떠나 1821년 3월 19일 말레이시아의 페낭 섬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페낭 신학교에서 몇 달 동안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다가 이듬해 2월 10일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이어 코친차이나로 가서 5~6개월 동안 머물렀고, 다시 통킹으로 가 2년 이상 머물며 신자들을 돌보다가 1825년 3월에 중국의 운남성을 거쳐 목적지인 사천에 도착했습니다. 앵베르 신부는 이곳에서 12년 동안 활동하는 가운데, 티벳 국경의 모팽에 신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1831년 9월 9일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채, 1835년 10월 20일 만주의 마가자라는 곳에서 사망하였습니다. 한편 앵베르 신부는 사천에서 조선 대목구의 설정 소식을 듣고, 1831년 파리 본부에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습니다. 또 1833년에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에 여러 번 자신의 뜻을 전달하였으나, 그의 지원은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망하자, 교황청에서 선교를 담당하는 기관인 포교성성에서는 1836년 4월 26일 앵베르 신부를 브뤼기에르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앵베르 주교는 교황청의 칙서를 1년이 지난 1837년 4월 초에야 받았고, 같은 무렵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망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앵베르 주교는 5월 14일 사천 대목구장 퐁타나 주교에 의해 성성됨으로써,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습니다. 성성식을 마친 앵베르 주교는 8월 16일 사천을 떠나 10월 말경 달단의 서만자라는 곳에 도착하였고 다시 북경, 산해관을 경유해 12월 4일 봉천(중국 선양의 옛 이름)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서 며칠 휴식을 취한 앵베르 주교는 12월 16일 봉황성의 변문에서 정하상 바오로, 조신철 가롤로 등을 만나 이들과 함께 12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주교가 되었으며, 조선 교회는 창설 53년 만에 조선 땅에 비로소 주교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입국 후 서울 후동의 정하상 집에 머무르며 한국어를 배운 앵베르 주교는 3개월 후에는 비록 부족했지만 우리말로 고해성사를 줄 수 있게 되었고, 5월부터는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서울과 경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먼저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103위 성인들이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전교에 힘쓴 결과, 1836년 초 6,000명이던 신자수는 1838년 말 9,000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앵베르 주교님은 중국 사천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조선 대목구의 설정 소식을 듣고 조선 천주교회를 도와주기 위해 자원하신 분이었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주교로 서품되고 2대 조선 대목구장이 된 다음에는 부임지인 조선으로 가기 위해 중국을 횡단하며 그 고단한 길을 걸어 조선 입국에 성공하셨습니다. 입국하기 전까지 조선교회를 위해 애쓰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