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늘 감사와 사랑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따뜻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어느새 연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 해 정리를 잘 하시고 잘 마무리하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이번 달에는 103위 성인 중 한 분이신 정화경 안드레아 성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요당리 성지에서 기억하고 현양하는 성인 중 한 분이십니다. 요당리 성지에서는 103위 성인이시며 우리나라 두 번째 주교님이셨던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님을 기억하고 현양하고 있습니다. 주교님께서 1839년 기해박해 때 박해를 피해 요당리 성지가 있는 지역으로 피신해 오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주교님의 은신처를 제공했던 분이 이쪽 지역(양간)의 공소회장으로 있었던 정화경 안드레아 성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화경 성인은 충청도 정산의 가세가 넉넉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웠습니다. 성장하면서 주위에 비신자들이 많자 신앙생활을 하기에 불편함을 느껴 고향을 떠나 수원 양간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지금 요당리 성지의 옛 행정구역이 수원 양간이었습니다. 성인은 이사를 하며 고향에 있는 자기 소유의 토지를 앵베르 주교님에게 바쳤습니다. 양간에서 회장으로 임명되자 공소를 세우고 주위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도왔으며, 종종 서울을 왕래하여 교회의 사정을 연락하는 일 등을 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발발하자 정화경 성인은 날마다 교우 집을 돌아다니며 신자들을 격려하고 순교를 준비시켰습니다. 6월 3일 앵베르 주교님이 박해를 피해 오자, 동료 교우 손경서 안드레아와 함께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한편, 주교를 찾고 있던 배교자 김순성(요한)은 정화경 성인이 주교님의 은신처를 알고 있을 거라는 주변 신자들의 말을 듣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김순성은 “이제 조정에서도 주교님과 신부님이 나타나면 천주교를 받아들일 것이며, 정하상(바오로)이 주교님께 드리는 편지를 가지고 왔다.”라고 정화경을 꾀이며 주교님의 은신처로 안내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정화경은 하룻밤 동안 고민을 하다가 결국 이튿날 김순성을 데리고 주교님의 은신처로 갔습니다. 이때 포졸들은 주교님 은신처 부근의 돌담거리 주막에 두고 김순성만을 데리고 은신처로 들어갔습니다. 정화경이 주교님에게 들어가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자 앵베르 주교님은 “네가 마귀의 속임을 입었다.”라고 하며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음을 깨닫고 자수를 결심하였습니다. 앵베르 주교님은 다음날인 8월 11일 아침 마지막으로 미사를 드리고 포졸들이 머물던 돌담거리 주막으로 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정화경 성인은 이때 주교와 함께 체포되고자 하였으나 앵베르 주교님은 그에게 “돌아가라”고 하였고 포졸들도 그를 체포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서울에서는 조선에 남은 두 명의 선교사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포졸들을 내려 보냈습니다. 이 두 신부님도 모두 103위 성인이십니다. 두 신부의 복사였던 이재의(토마스)와 최 베드로가 서울의 박해사정을 신부들에게 보고하러 길을 가던 중 정화경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정화경의 예전 소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으나 정화경의 요청으로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파견된 포졸들을 주막에서 만났습니다. 이들은 정화경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며 그에게 다가가 두 신부가 서울로 가는 즉시 종교의 자유가 선포될 것이라며 또다시 그를 꾀였습니다. 그러면서 함께 있던 이재의와 최 베드로 역시 신자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그들을 불렀으나 이들은 포졸들을 무시하고 길을 계속 떠났습니다.
정화경 성인은 고지식하고 아둔한 면이 있던 분이었습니다. 정화경 성인은 이번에도 포졸들에게 속아 앞에 지나간 두 행인이 신부가 있는 곳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포졸들은 신부를 찾아오라고 정화경 성인을 풀어 주니, 이제야 정화경 성인은 포졸들의 계략을 눈치 채고 피신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본 후 신부를 피신시켰습니다.
결국 정화경 성인은 9월에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치도곤 100대를 맞는 등 심한 고문을 받은 뒤 이듬해 1월 23일 포도청 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33세의 나이로 순교하셨습니다.
순진하고 아둔한 면이 있어 배교자 김순성에게 속아 주교님 은신처를 알려드리는 실수를 범하고, 신부를 잡으러 온 포졸들에게 또 속아 신부들의 은신처를 알고 있는 동료 신자들을 알려 주는 등 성인은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을 때 느꼈던 자책과 한탄은 얼마나 컸을까요. 하지만 이미 저지른 잘못과 부족함에 빠져있지 않고 나름대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결국 체포되었을 때 배교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 치도곤 100대라는 엄청난 혹형도 성인의 신앙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에서 실수하고 잘못하고 유혹에 속기도 하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정화경 성인의 인간적인 약점이 우리들의 부족함을 새삼 느끼게 해줍니다. 그럼에도 결국엔 순교로 승리자가 되셨듯이 우리도 인간적인 부족함을 넘어서 신앙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일러 주시는 정화경 성인입니다.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