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늘 감사와 사랑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청명한 하늘과 선선한 날씨가 완연한 가을임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좋은 때에 우리 나라 반대편에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터졌습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도 끝나지 않았는데 또 하나의 전쟁이라니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먼저 이스라엘을 공격한 하마스의 만행으로 촉발된 전투는 벌써 양측의 소중한 생명을 많이 희생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포위하고 난민들이 빠져나갈 국경마저 이웃나라는 봉쇄해 버리고, 식량, 물, 전기도 끊고 지상군을 들여보낼 예정이라니 군인은 물론이지만 특히 무방비상태인 민간인들이 수없이 많이 희생될 것입니다. 상처를 입고 겁에 질려 슬프게 우는 팔레스타인 소녀를 보며 가슴이 더욱 아팠습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역사 안에 있었던 관계 세력들의 불의와 폭력과 죽음과 증오와 복수가 쌓여 다시 처절한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용서와 연민과 이해와 대화와 협력을 기울이는 것보다는 서로를 비난하고 서로를 탓하며 책임을 돌리며 악의 구렁텅이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과 관련자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아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한 이들이 이러한 사태를 발생시켰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도 참혹한 것입니다. 이미 희생된 이들을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우리는 전쟁이 멈추기를 하느님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기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달에 이어 1935년 <경향잡지>에 투고한 장주기 성인의 증손 장 가밀로의 증언 마지막 부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죽지 않고 사느라니 고생이 어떠할고? 그러다가 (장주기) 요셉의 손자가 차차 장성하매 할 일(할 수)없이 백계무책(百計無策: 있는 꾀를 다 써도 소용이 없음)으로 지게를 짊어지고 노동으로 몇 푼식 벌이하고 (장주기) 요셉의 자부(子婦: 며느리)는 남의 집에 다니면서 물도 길어주고 밥도 지어주어 부엌의 온갖 심부름을 다하여 밥술을 얻어다가 식구를 먹이며 주성모(主聖母)께 의탁하고 세월을 보내더니, 또한 세상을 버리는지라.
그 후로 (장주기) 요셉의 손자가 육신생활의 곤란이 너무나 참혹하여 노동 중에도 제일 하등 노동자의 천대를 받아가며 겨우 연명할 새 무거운 짐을 날마다 짊어지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느라고 몸이 성치 못하여 종내에는 병이 골수에 들 입으로 날마다 피를 토하니, 결국은 막벌이도 못하고 속절없이 굶어 죽게 되매 그제는 할 일(할 수)없이 아내가 남의 집 부엌간으로 다니며 온갖 일을 죽을 힘을 다하여 밥덩이를 얻어다가 자기 가장과 어린 자녀들의 목숨을 구하여 주었으니, 그 동안 남의 천대와 당한 설움은 얼마나 참혹하였으리오?
그 때에 (장주기) 요셉의 증손 가밀로가 서울 황단앞에 저경궁(儲慶宮)이라 하는 동리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가밀로가 자기 부모들이 고생하는 것을 다 목도하여 온 일인 고로 그 일에 다소간 기억이 되어 이 본문을 기재하였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1905년 전후)에 자기 부모와 한가지로 다시 제천으로 내려가서 자기 증조부(장주기 요셉)가 건축한 신학원 옛터(제천 배론)를 찾아서 거처할 새 가밀로의 부친은 군난 중 노동생활로 몸이 상하여 중한 병으로 몇 해 살지 못하고 선종하였으며, 그 후에 가밀로의 모친도 벌써 세상을 떠났다한다.
순교자의 후손이 가난하게 고통받는 삶을 알려주면서 증언은 끝납니다. 옛날 신자들의 삶은 가난했습니다. 당시 신자들의 직업이 고공, 유모, 김치장수, 삯바느질 등이었던 것을 보면 그 형편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예를 살펴보면, 우술임은 양주 고을 양반집 딸로서 15세에 인천의 신자 남성과 혼인하여 남편의 권고로 입교했으나, 여러 신자 집에서 하인 노릇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습니다. 정약종의 딸 정정혜는 바느질과 길쌈으로 어머니와 오라비와 자신의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22세의 젊은 동정녀로 죽은 원귀임은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전경협, 박희순, 김유릿다는 모두 궁중의 나인이었는데 이들은 궁궐의 넉넉함을 미련 없이 버리고 함께 살았습니다. 한영이는 어떤 교우 집에서 살았는데 극빈의 고초를 겪어야 했고, 순교자의 아들인 박명관은 물장사를 업으로 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자신도 가장 천한 일로 여기던 짚신과 미투리를 삼아 처자를 부양했습니다. 이렇듯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을 지켜 온 신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은 경제 발전으로 신자들도 많이 경제적,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습니다. 가난하여 고통받으며 살았던 신앙선조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이 풍요로움을 다른 가난한 이들과 나누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날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가난’을 의식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부유함이 가져다주는 안락함과 편안함을 잘못 생각하면 신앙도 편하고 안락함을 추구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내가 많이 갖고 있다면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덜어내어 ‘마음의 가난’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