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습관적으로 암송하면서 특별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게 된다. 기도문이 어떤 내용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세세하게 묵상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이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너무 미워했다. 미움을 없애 달라는 기도를 드렸어도 그 미움이 사라지지 않는 거였다. 오히려 더 커지기만 했다. 미움이 대상인 사람은 자신이 준 상처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 듯 했다. 그저 따지지 않는 나보다도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멀쩡히 일상을 살아가는 내 미움의 대상자는 아무렇지도 않는데 나는 왜 괴로워하는 것일까.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었다. 그래야 미움과 분노가 사라질 것 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용기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지경에 이르게 하는데 나도 한몫을 하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성찰을 했다.
고백성사를 통해 미움이 대상자를 어떤 방식으로 잊어야하는 지를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고백실 문을 두드렸다.
나는 있었던 사건을 고했다. 듣고 계셨던 신부님이 주의 기도에 관해 설명을 하셨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충격이 왔다. 그리고 신부님께 물었다. 주의 기도에 그런 구절이 있었느냐고.
우리가 지은 죄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양심과 정의 보다는 죄와 밀접해 있을 것 같다.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며 살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음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 하느님은 당연히, 무조건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용서를 해주시지 않는 느낌이 들면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할지도 모르는 패륜적 내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잘못한 이를 먼저 용서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에도 몇 번을 드리는 주의 기도를 그저 외운 것이지 곰곰이 묵상을 하지 않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고백성사를 통한 깨달음으로 그 후엔 기도문의 내용을 깊이 묵상하며 하느님이 내게 바라시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기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요즈음, 자신이 타인에게 주었을지도 모를 아픔이 있는지, 자신의 판단으로 다른 이들을 미움의 대상으로 만들지는 않았는지, 사람과의 관계를 성찰하며 아기예수님을 기쁘게 맞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