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에서의 ‘무덤’은 여러 상징과 의미를 갖습니다. 우선 구약에서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여러 규정을 내리시는 부분에서, “누구든지 주검, 곧 죽은 사람의 몸에 닿은 이가 자신을 정화하지 않으면, 그는 주님의 성막을 부정하게 만든다. 그런 자는 이스라엘에서 잘려 나가야 한다. 정화의 물을 자기 몸에 뿌리지 않아, 그가 부정한 그대로이며 그의 부정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민수 19,13) 또, “들에 있다가 칼에 맞아 죽은 이나 저절로 죽은 이, 또는 사람의 뼈나 무덤에 몸이 닿는 이는 모두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민수 19,16) 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몸에 정화의 물을 뿌려야 하고 뿌린 이들도 자기 옷을 빨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민수 19,21참조) 이것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거룩한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할 때의 가르침이기에 그들에게 더 큰 의미를 지녔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이 무덤(주검)에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말라는 거부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실제로 구약 전반에서 여러 예언자들과 임금들을 무덤에 묻고 장사 지내는 이야기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의 ‘무덤’은 예수님을 통해서 전혀 다른 의미와 상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여러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책망하시며 그들을 “회칠한 무덤”(마태 23,27) 이라고 칭하기도 하셨고, 무덤에서 나오는 마귀 들린 이들을 마주하시기도 하셨지만(마태 8,28;마르 5,3),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과부를 가엾이 여기시어 그 아들의 관에 손을 대시고는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하시어 그를 살리셨고, 마침내 이미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라자로의 무덤 앞에 서시고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한 말씀으로 다시 살리셨습니다. 바로 무덤이라는 죽음에서부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하셨던 그 생명에로의 전환을 몸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전환은 예수님 부활 사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으로 향했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음을 목격하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 그 부활의 첫 소식을 전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요한 20,2) 곧장 무덤으로 달려갔던 두 제자는 바로 주님이 남기신 ‘빈 무덤’이라는 부활의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7-8) 이제는 더 이상 무덤은 죽음이 아니고 거룩한 생명을 감싸고 있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그 영혼들을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께 맡기며 간절히 자비를 청하게 되는 때를 맞이합니다.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의 무덤을 참배하고 기도하게도 되는데요, 언제나 보여지는 현상을 통해 그 너머에 있는 소중한 것으로 건너감을 알고, 죽음의 상징에서 생명의 하느님이 살리심을 깨닫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하기 위하여, 순교자들의 묘역을 참배하는 것도 아주 좋은 신앙의 행위가 될 듯도 합니다. 계절의 깊이가 더 해가는 이 시기, 그만큼이나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더 깊이 일치되어 가는 날들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추워지는 날씨에 건강에도 유의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