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가사>에 보면, 1866년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남한산성 동문 밖 개울에 버려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구산 순교자들의 후손들도 1868년에 순교한 5명의 경주 김씨 순교자들의 시신이 남한산성 동문 밖 성 밑 개천에 버려져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이들 시신은 처음부터 개울에 버려진 것이 아니다. 개울 위에 있는 언덕에 버려진 시신들이 개울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정씨가사>에 “증조부의 시체는 언덕에서 나려 굴러 낭떠러지 바위 밑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풀을 베어 덮고 돌로 표를 하고 도라 오다가”라고 언급되어 있다. 동문 밖 개울 옆에 낭떠러지가 있고 그 낭떠러지 위의 언덕에서 버린 시신들이 낭떠러지 아래에 있는 개울로 굴러 떨어졌다.
신유박해 때 한덕운이 순교한 참수터는 동문 밖 물레방아간 아래쪽에 있는 평평한 너른 밭으로 이해된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너른 장소이고, 옛 길 가에 있고, 동문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참수터로 활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이다.
김덕심, 이 요한, 오 안드레아 외에도 여러 신자들이 순교한 감옥터는 로터리 주차장 근처의 천일관 옆에 포도청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지점이다. 이곳에 9칸의 포도청이 있었고, 그 위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 21칸의 감옥이 있었다.
여러 신자들이 관장에게 불려가 신문을 받다가 매 맞아 죽거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는 판관이 집무하던 동헌 뜰과 중군이 집무하던 동헌 뜰, 그리고 유수가 집무하던 동헌 뜰이었다. 신자들을 신문하는데 있어서 주된 역할을 하던 판관이 집무하는 동헌은 제승헌(制勝軒) 곧 이아(貳衙)로 연무관 뒤쪽에 있었고, 서울에 있다가 일이 있을 때만 내려와 신자들을 신문하던 중군이 집무하는 동헌은 수어영 곧 연무관이었으며, 특별한 경우의 신자들만을 신문하던 유수가 집무하는 동헌은 신유박해 때는 수어영이었고, 기해·병인박해 때는 좌승당 또는 수어영이었다.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성 밖으로 나갈 때 이용한 시구문은 동문 오른쪽 수구문 우측에 있는 작은 문이다. 순교자들의 시신을 버린 곳은 시구문을 나가 공동묘지로 나 있는 길 왼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 가운데 가족들이 거두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된 시신들은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매장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곳 순교자들의 시신이 버려진 곳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서종태(한국교회사 연구소 연구실장), 남한산성의 형장과 천주교 신자들의 죽음, 敎會史學(창간호), 남한산성 성지와 수원교구 천주 신앙의 역사적 고찰, 수원교회사연구소, 2004. 참조
순교의 향기가 가득한 가을의 첫 달, 남한산성의 많은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신앙의 여정을 굳건히 다지는 날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지에도 방문하시어 순교자들의 후손으로서 삶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갈 마음의 선물도 받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건강하시도록 모두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