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에서 사진과 같은 자료집을 펴냈습니다. 단내 성가정 성지에서 현양하는 두 분의 순교자 하느님의 종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에 대해서도 잘 정리가 되었기에 거의 그대로 2회에 걸쳐 옮깁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의 모범과 용기를 본받고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정은 바오로는 경기도 이천고을 단내 마을 사람으로, 양지 은이의 한의사로 신자였던 조성진에게 등창 치료를 받으면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하였다. 병오박해 직전인 1846년 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가 조선에 입국한 지 약 3개월 되던 때, 용인, 양지, 광주 일대에서 비밀리에 부활 판공성사를 집행하러 순방중이었다. 이때 정은 바오로는 김 신부를 밤중에 몰래 단내 그의 집으로 모셔서 10여명의 신자와 함께 고해성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가족과 동네 사람들은 신앙심이 굳지 못하여 박해를 입을까 늘 두려워하였고, 정은 바오로만큼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지 못하였다. 다만 그의 재종손 정양묵 베드로만은 평소 열심한 신앙생활을 갈망하였고, 할아버지 정은의 신심을 흠모하고 있었다.
정은 바오로의 신앙심은 한결같았다. 병인박해가 닥쳐오자 그의 집안사람과 이웃은 포졸의 습격을 피해 도망가기에 바빴으나, 그는 오히려 태연하게 포졸을 맞이하였다. 아들 정 필립보가 눈물을 흘리며 “빨리 피하셔서 훗날을 도모하시라” 간청하였지만, 이를 뿌리치고 피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포졸은 정은 바오로를 체포하였고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정양묵 베드로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끌려가서 관장의 심문을 받았으나, 한결같이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에 관장은 그들을 모두 백지사형에 처했다. 백지사형은 죄인의 손을 뒤로 묶어 나무기둥 등에 단단히 고정해 놓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한지를 여러 겹 덮어씌워 질식시켜 죽이는 형벌로, 교수형과 함께 감옥안에서도 많이 행해지는 대표적인 비공개 사형집행 방식이다.
정은 바오로의 사위 박 서방과 그의 팔촌 박선여 등은 남한산성 포교에게 시신에 표를 해 둘 것을 부탁하였다. 정은 바오로와 그의 재종손 정 베드로의 시신은 동문 밖 개울가에 버려졌는데, 밤중에 정은의 아들 정 필립보가 와서 표를 해 둔 부친의 시신만을 업고 단내 오방리 산 아래 길위, 현재의 단내 성가정 성지 부지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함께 순교한 정양묵 베드로의 시신은 끝내 유실되었다.
정은 바오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 방문했을 때, 벽에다 종이 한 장을 붙이고, 그 위에 십자고상을 걸어두고 성사를 보기 위한 마음의 준비와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이를 통해서 정은 바오로는 신앙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갈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정은 바오로의 열성적인 신앙심을 본받아 성사생활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갑자기 우리에게 신앙을 배반하도록 강요하는 박해가 닥칠 때에도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신앙을 고백하고 하느님을 증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은 바오로의 순교신심을 이어받은 그의 후손가운데 정원진(1976.3.5.선종) 루카, 정운택(수원교구 원로사목자) 안드레아 신부등의 성직자가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