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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5-01 조회수 : 164

찬미예수님!


늘 감사와 존경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안녕하셨습니까? 참으로 좋은 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맑은 하늘과 따뜻한 햇볕, 선선한 바람, 초록빛 나무들, 만개한 꽃들로 아름답고 기분 좋은 봄을 진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성지도 무척 아름답게 변했습니다. 가장 많이 꽃 핀 붉은 색 영산홍과 보라색, 흰 색 영산홍이 녹색의 잎과 어우러져 성지를 변모시켰습니다. 성지를 찾아주시는 많은 분들이 성지가 너무 예쁘다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작게나마 성지를 관리하는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불청객 잡초들도 기승을 부리며 올라오는 때이기도 합니다. 잡초를 뽑으며 대응하고 있지만 그 위세는 상당합니다. 그래서 자꾸 잡초가 어디 있나만 바라보게 됩니다. 잡초만 보고 있자니 기분이 불편했는데 문득 전체적인 성지의 경관을 바라보며 잡초를 능가하는 더 넓은 잔디밭을 보며 기분이 다시 좋아졌습니다. 너무 부정적인 것만 바라보면 부정적인 것만 보이고 생각이 거기에 고정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면보다 더 많은 긍정적인 면들을 생각하며 이번 달도 즐겁고 기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이번 달에는 장주기 성인 유해의 이장에 대한 증언과 기록의 마지막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1894년 장주기 성인 등의 유해 귀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은 <뮈텔 주교 일기>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7대 조선대목구장인 뮈텔 대주교는 1890년 8월, 자신이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선종하기 직전인 1933년 1월까지 거의 매일같이 일기를 남겼습니다. 이 방대한 일기 내용은 뮈텔 대주교의 개인 역사일 뿐 아니라 당시 한국교회와 그와 관련된 시대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1882년에 수습된 장주기 성인과 동료 순교자의 유해는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 보관되다가, 1893년 뮈텔 주교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나가사키 교구장은 유해를 상자에 봉인하여 배로 보냈으며, 뮈텔 주교는 직접 제물포로 가서 유해를 인수받고 서울로 돌아와 용산 예수성심학교에 안치했습니다. 뮈텔 주교는 그 과정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하였습니다. 다음은 그 내용입니다. 


1894년 5월 13일 (일)

  “목요일(5월 10일)에 제물포에 당도한 포르페 호는 나가사키에 있던 우리 순교자들의 유해를 우리에게 실어다 주었다.” 여기에서 순교자들의 유해는 1882년 3월에 당시 조선대목구 부주교 블랑 신부가 장주기 성인,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등 4위 유해를 수습했는데, 임오군란 발생 등 정국이 불안해지자 4위의 유해를 일본 나가사키 교구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일본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 유해가 귀환되었던 것입니다. 


1894년 5월 20일 (일)

  “5시경에 나는 푸아넬 신부(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1894년 당시 현재 명동주교좌본당의 주임)와 함께 용산으로 갔다. 제물포로 가서 포르페 호의 함장을 방문하기 위해서이다.” 


1894년 5월 21 (월)

  “3시 반에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아침을 먹다. 우리는 5시에 용산 호의 갑판에 올랐으나 배는 7시 40분에야 출발하다. … 온 종일 비, 4시 반경에 제물포의 당가(當家: 전교회 지부)에 도착하다. …”


1894년 5월 22일 (화)

  “10시 45분에 포르페 호의 대형 보트와 포경정(捕鯨艇)이 부두에서 우리를 기다리다. … (주한 프랑스 공사관 대리공사) 르페브르씨, 푸아넬 신부, 마라발 신부, 나(뮈텔 주교), 이렇게 네 사람이었다. … 4시경에 우리는 포르페 호가 나가사키에서 실어 온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그리고 장(주기) 요셉 회장 등 우리 순교자들의 유해들을 특별히 불러온 조선 배에 옮겨 실었다. 대형 보트는 우리를 다시 육지로 인도해 주었고 … 우리는 자정에 떠날 예정인 용산 호를 타려고 9시에 출발하여 가능하면 좀 덜 불편한 밤을 보낼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았다.”


1894년 5월 23일 (수)

  “우리 배는 4시가 되어서야 출발했다. 11시경에 용산(신학교)에 도착하여 그 소중한 유해들을 거기에 모셔 두고, 우리와 함께 여행을 한 르페브르 씨와 서울로 출발하였다.”  


  위와 같이 뮈텔 주교는 장주기 성인 등 4위의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치했습니다. 그 후 명동성당 지하묘역이 완비되어 4위의 유해는 1900년 11월 4일 명동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1967년에 4위의 유해는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로 옮겨 현재까지 안장되어 있습니다. 현재 요당리 성지에는 장주기 요셉 성인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습니다.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