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은총의 사순시기를 마치고 빛의 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늘 마찬가지로 시기(時期)가 가져다주는 뜻이 있기에 우리는 이 흐름에 함께 하며 이어지는 일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나가게 되는 듯합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은 우리에게 빛과 생명의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어둠을 이겨낸 빛, 죽음을 이긴 생명. 이 반대되는 두 가지 중 하느님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드러내주지요. 사실 양 극단의 것들은 우리 삶 속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멀리 있다 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일상의 모든 사건들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피하기 어렵고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우리에게 남습니다. 둘 중 하나, 중간은 없습니다. 적당히 양 쪽에 발을 담그고 적절히 무게중심을 옮겨 가며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분께서 당신 친히 그 말씀을 참된 길로 제시하셨고 사랑을 증거 하는 진리를 보여주시며, 궁극적인 생명으로 건너가는 부활을 드러내셨듯이 우리가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절한 타협은 없는 듯합니다.
우리는 지난 성주간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다양한 인물들을 마주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하고 있는 군중들과 백성의 원로들, 저 뒤에서 눈치를 살피며 나서지 못하고 외면하고 있는 그분의 제자들, 또 멀리서 통곡하고 아파하는 많은 여인들과 반면 앞장서 그분을 조롱하고 학대하는 군사들,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빌라도와 주님과 함께 처형된 두 명의 죄수들. 뿐만 아니라 부활의 장면을 제일 먼저 확인했던 막달라 마리아와 그 여인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갔던 베드로와 요한, 낙심하여 낙향하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마주쳤던 제자들과 직접 보고 만지기 전까지는 믿지 못하겠다고 우기던 토마스. 수난의 장면에도 부활 이후에도 참으로 떨치기 어려웠던 두려움이라는 무거움도 우리에게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많은 인물들과 그들이 가졌던 인간적인 부족함들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두고 드러나게 됩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어떠할까요? 우리의 자리는 어디쯤일까요? 어둠을 이기는 빛 앞에서, 죽음을 이기는 생명 앞에서 오늘의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의 부활의 길을 뒤따르며 적절한 타협은 없을진대, 부활을 앞두고 제 자신을 돌아보며 아마도 부단히도 노력하며 양 쪽 그 어딘가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가 그리도 어려운 것인지, 무엇을 그리도 두려워하는지.... 주님이 보여주신 생명의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것일까. 혹 어떻게 부활을 맞이하셨는지요.
부활은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이것은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든 변함없는 것입니다. 희망과 기쁨은 우리가 지금의 처지에 주저앉지 않으며 계속해서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비로소 그 의미를 갖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와 어둠을 통해서 죄를 사하시고 어둠을 이기셨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내 처지의 부당함보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의 방식이 훨씬 크다는 것, 이것이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건강하고 기쁘게 부활 시기 보내시고, 따뜻한 봄 성지에서 뵙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부활 감사송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