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 관리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양근성지 후원 가족 모두 주님의 도우심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1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인간과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프로이트는 성욕이라고 보았고, 융은 자기실현을 위한 개성화라고 여겼으며, 아들러는 열등감의 극복과 우울감의 추구라고 보았고 베커는 죽음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불멸 추구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동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하느님이고, 예수님과 성모님 안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실행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크 리어리는 ‘자기의 저주’라는 저서를 통해서 자기의식과 자기애가 삶에 미치는 다양한 부정적 영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기(self)는 우리의 가장 커다란 지원군이자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출현은 우리 조상이 다른 종에 대한 우위를 지닐 수 있는 진화적 이점을 주었으며 오늘날의 문화와 문명을 발달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식을 갖는 것이 항상 축복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독특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자기인식 능력으로 인해서 자신의 미래를 예상하고 결과를 예측하며 계획을 세우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많은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인식 능력은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제공 했지만 행복과 성장을 저해하는 커다란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습니다.
자기의식은 자신에 관한 지각을 왜곡하여 잘못된 선택과 결정에 이르게 합니다. 현실의 자기와 이상의 자기 간 괴리로 우울해하고, 현실의 자기와 의무의 자기 간 괴리로 불안해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반추하고 미래를 상상하게 함으로써 우울, 불안, 질투와 같은 부정적 정서의 고통을 유발합니다. 이기심과 자기 중심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단점에 눈멀게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편향성을 촉진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손상 시킵니다. 또한 자기의식은 자신과의 관련성에 따라 사람들을 내집단과 외집단으로 분리하여 사회적 갈등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종교와 영성에 있어서도 이기적인 자기는 영적 성장을 방해하고 부도덕한 행동으로 인도하는 가장 강력한 훼방꾼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어느 날은 내가 제일 잘났다 하고 어느 날은 내가 제일 못났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기의식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기능을 방해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유발하며 사회적 갈등과 투쟁을 증폭시킵니다. 이런 점에서 자기의식은 인간에게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의 이야기이지만 자기의식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대가는 죽음에 대한 예기불안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신의 죽음을 인식한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혹은 자기의식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고 본능에 따라 살며 자기와 싸우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건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감사한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겸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남편 요셉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성모님과 약혼한 후 같이 살기 전에 성모님의 임신 소식을 듣고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꿈에 주님의 천사로부터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모태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장 20-21절)라는 말씀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한편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하늘 아버지에게 와서 잠시 이 세상 삶을 살다가 하늘 아버지가 계신 하늘로 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고 바꿀 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한하고 일시적인 존재인 인간이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진실인 것 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존재 이유이고, 목적인 것 입니다. 이를 모르고 유한하고 일시적인 삶에 집착하는 신앙 없는 이들을 볼 때 안타까운 것입니다.
동양, 특히 중국의 맹자 시대에 살았던 장자의 ‘고분지통’(鼓盆之痛)은 우리에게 선사하는 의미가 상당합니다. 그래서 장자의 고분지통을 소개하며 1월 편지를 마치고자 합니다.
고분지통(鼓盆之痛)은 항아리를 두드리는 아픔, 또는 아내가 죽은 슬픔을 의미합니다. 고분지통은 장자의 ‘지락’(至樂) 편에 나오는 장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유래합니다. 장자의 아내가 죽어서 혜자가 조문을 갔습니다. 그런데 장자는 두 다리를 뻗고서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혜자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아내와 함께 살며 자식을 키우고 함께 늙었네, 그런 아내가 죽었는데 곡을 안 하는 것도 너무한 일인데,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까지 부르고 있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이에 장자가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네, 아내가 죽었는데 난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런데 삶의 처음을 살펴보니 본래 삶 이란게 없었고,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는 형체도 없었으며,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기조차도 없었던 것이네,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가운데 뒤섞여 변화하여 기가 생겨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이루어지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이루어졌다가, 지금 또다시 변화하여 죽음으로 간 것이니, 이것은 마치 봄,여름,가을,겨울이 되어 사계절이 운행되는 것과 같다네. 이제 아내는 천지라는 큰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데, 내가 관습에 따라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은 스스로 천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여겼기에, 그래서 그만두었다네.”
우리 삶에는 바꿀 수 있는 게 있고, 바꿀 수 없는 게 있으니 요셉 성인의 겸손을 본받아 자기 관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2023년 1월 새해 아침에
양근성지 전담 권일수 요셉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