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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성지 신자 글

죽음과 관련된 언어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1-01 조회수 : 191


11월은 위령성월이다. 죽은 영혼을 떠올리며 위로의 기도를 드려야한다. 죽은 이를 통해 살아있는 이를 위한 기도가 아니다. 그런데도 살아있는 이를 어떻게 해달라고 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흔하게 목격되고 있다.

얼마 전이었다. 가족과 함께 모친상을 당한 아는 사람의 상가에 문상을 다녀왔다. 같이 갔던 가족은 자신의 한탄을 늘어놓아 당황스러웠다. 의사의 오진이며 과잉진료에 대해 침을 튀겨가며 욕설과 함께 늘어놓았다. 나는 슬며시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음에도 가족중 한 사람이 희생당했다는 것을 구구절절이 쏟아냈다. 그것도 모자라 호상, 을 입에 올려 더욱 난감했다.

누구든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고 죽은 이에게 잘 죽엇다는 사람도 없다.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며 사용해야 한다. 고인은 죽음에 가까워도 삶의 애착이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지 않은가. 유족의 관점에서 고인의 죽음은 아쉽기만 하다. 생전에 다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죄의식으로 더욱 서글픔에 빠지기 마련이다.

문상은 죽은 이의 명복을 빌고 유족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이다.

 

죽음에 관련된 언어를 어학사전에서 찾아봤다.

* 상처(喪妻)

[명사] 아내의 죽음을 당함.

상처하다 (喪妻하다) [명사] 아내의 죽음을 당하다.

* 미망(未亡)

[명사] 남편은 죽었으나 따라 죽지 못하고 홀로 남아 있음.

미망인 (未亡人) 남편을 여읜 여자. 춘추좌씨전<장공편(莊公篇)>에 나오는 말이다

상처한 남편에게는 위로를 전하라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런가하면 배우자가 죽음으로 떠난 여자에게는 왜 남편을 따라 죽지 않느냐는 책망의 느낌이 들게 한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두 언어를 풀이하면 말도 되지 않는다고 야단을 치실 것 같다. 마치 여자를 남편의 부속물 취급을 받는 뉘앙스를 풍긴다. 남편이든 부인이든 배우자를 죽음으로 먼저 떠나게 된다면 같은 위로를 받아야한다. 굳이 페미니즘을 적용하지 않아도 상하를 나누는 자체가 예수님이 원하는 인간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누구나 존중해야 하고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

스산한 늦가을의 나무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 둘 떨어트린다. 함께 웃기도 했고 즐거움을 나누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미 죽음으로 곁에없다면 그 사람들을 떠올리며 위로의 기도를 드리는 위령성월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