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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성지 신부님 글

양근 성지에서 온 편지 11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1-01 조회수 : 238

+  꿈으로 말씀하시고 춤추시는 하느님을 위하여!


양근성지 후원 가족 모두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11월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 곁으로 가신 연령들을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은 그 누구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11월 한 달 즐겁고 기쁘게 보내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매일 밤 꿈을 꿉니다. 흔히 꿈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의 실현이라고 프로이드는 이야기합니다. 이와 함께 ‘융’이라는 사람은 꿈은 무의식 안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이고, 현재를 살고있는 개인의 영적인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느님은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 불안해하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시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려는 동방박사들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특히 요셉은 꿈을 통해 하느님의 음성을 자주 듣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매일 꾸는 꿈을 찬찬히 관찰해보면 자신의 내면 상태를 알 수 있고, 내가 무엇을 소망하는지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공공장소에서 알몸으로 있는 꿈은 대개 꿈꾼 사람이 적절한 페르소나 즉 가면이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실내에서 신발을 벗어 놓고 들어갔다 나오는데 자신의 신발이 없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폰 프란츠’에 의하면 신발은 우리가 입은 가장 낮은 부분이며, 현실과 관련한 우리의 입장을 대변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실내에 들어가려고 현관에 신발을 벗어 놓고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자신의 신발이 없는 꿈을 꾼다면 현실과 관련한 그 사람의 입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은 현실과 오늘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한편 오늘날에도 우리 한국 사람들은 돼지 꿈을 꾸면 돈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하여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심층 심리학적인 의미에서 돼지는 땅과 연관된 동물이며 우리의 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돼지 꿈을 꾸는 신자들은 영적인 것에 많은 가치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 육적인 본능에도 신경 써야 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돼지는 더이상 더러운 동물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이고 아껴야 할 본능인 것 입니다.


꿈에 악몽을 꾼다는 것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꾸는 꿈으로 무의식의 문제로 인해 위험한 상황에 대한 경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어딘가 너무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사람은 아마도 자기 자신을 너무 높게 생각하고 있거나 혹은 낭만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가시적인 세계나 이론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다면 자신의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나는 춤추는 신만 믿을 수 있다.” 춤추는 신이라니? 루카 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춤추는 아버지로 비유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을 챙겨 먼 지방에 가서 제멋대로 살다가 가진  것을 다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탓 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환대하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음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며 즐거워하는 잔치를 베풀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기뻐하면서 거기 참석한 이들과 함께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심각하고 무겁게 살면서, 슬픔과 고통에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춤을 추어야 합니다. 춤을 추는 것은 삶을 긍정하고 축하하고 기뻐하며,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신나게 사는 것 입니다.  


춤이라고 하면 차차차, 지루박, 탱고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맞추어 혹은 기분에 맞추어 추는 막춤입니다. 막춤이야말로 최고의 춤입니다. 왜냐하면 막춤에는 규율, 통제, 간섭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2세기 그리스도교 문헌으로 알려진 묵시적인 요한행전 즉 외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춤을 추었던 그리스도의 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날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주위에 원을 그리며 아버지를 찬양하며 손에 손을 잡고 함께 춤을 추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춤추며 하느님을 찬양했던 다윗은 춤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의 자루 옷 푸시어 저를 기쁨으로 띠 두르셨습니다.” (시편 30장11-12절)



트라피스트 수도사였던 ‘토마스 머튼’도 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집념을 모두 떨쳐 버릴 수 있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하느님의 신비스러우면서도 질서 정연한 춤사위를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춤사위를 흉내 내기 위해 그리 많은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밝은 별이 비친 밤에 혼자 있을 때, 가을에 철새들이 먹이를 찾아 쉬러 곱향나무 작은 숲으로 내려앉는 것을 우연히 볼때에, 아이들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줄때에, 우리의 가슴 속에 사랑이 있음을 알았을 때에, 일본 시인 ‘바쇼’처럼 고요한 연못, 개구리 나라에서 늙은 개구리 한 마리가 텀벙하고 물 튀기는 소리를 들을 때에, 이럴 때 깨우침, 가치관의 전도, 새로운 비움, 그리고 자신을 깨닫게 해주는 순수한 시각은 질서 정연한 춤사위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해줍니다. 세상과 시간은 비움 안에서 춤추는 주님의 춤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고집할수록, 그 잘못된 생각을 우리의 결론과 복잡한 목적으로 분석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슬픔과 모순과 실망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별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떤 실망도 실재를 바꾸어 놓을 수 없으며 언제나 그곳에 있는 질서 정연한 춤의 기쁨을 훼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우리 자신을 잊고, 심한 자존심을 바람에 흩날려 버리고, 모두 함께 어우러져 춤추는 데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은 여전합니다. 


‘디오니소스’형 인간은 삶의 충만한 힘을 만끽할 뿐만 아니라 파괴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낙타’형 인간은 가족 부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매일 아침 일어나 직장으로 출근하는 범속한 인간입니다. 낙타형 인간은 춤을 출 수 없고 공중으로 도약할 수 없습니다. 그의 삶과 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낙타형 인간은 왜 자신이 삶의 충만한 기쁨과 웃음을 잃고 춤을 잃어버렸는지 돌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전통적이고 인습적인 교의의 틀을 강조하며 진지 하고 심각하게 살라고 주문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의 기쁨은 사라져 버리고, 무미건조하고 완고한 모습만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노동하며 사색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놀이하며, 축제하는 존재인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얼쑤’ 하고, ‘얼씨구 좋다’하는 조상의 지혜를 배워야 할 것 입니다.    

    

2022년 11월 디오니소스 신과 함께  

양근성지 전담 권일수 요셉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