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현실의 답답한 상황을 힘겨워하다 만족을 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일종의 바람이지만 순간의 행복에 젖어든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잊을 수 있어 더욱 상상의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이 상상의 세계는 현실과 너무 달라 망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대부분 유토피아를 간절히 바라며 그 안에 갇혀 허상으로나마 만족을 느껴 현실과 이상을 구분 못한다. 유토피아는 현실성이 전혀 없는 이상, 그 자체다.
그러다가 자신이 꿈꾸는 유토피아를 실제로 있는 거라고 기억을 하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얼마 전이었다. 가족과 식사를 하는데 내게 묻는다. 마흔 살이 가까운 친정조카에 대해였다. 그 애의 혼사 날이 언제냐고.
날을 잡았냐고도 아니고, 만나는 사람이 있느냐고 아니었다. 모든 것을 건너 뛴 질문이었다. 나는 좀처럼 친정식구에 관한 것을 말하지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물어 무슨 망상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 애에 관해 어느 것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는 습관을 지적하며 누구와 대화를 나눌 때는 다른 생각을 하거나 떠올리지도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지켜질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기억한다. 같은 곳에 있었어도 기억이 다른것이 그런 이유이다. 요즘엔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녹취를 남기거나 메모를 하는 게 기억을 정확히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기억의 오류로 인해 발생할 불상사는 생각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언어도 통일 되지 않았고 문자도 없었던 시대에 존재했던 하느님,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돼 기억해 전해졌다. 다행히도 기억의 오류가 없어 현대에도 이해할 수 있는 성경으로 남겨졌을 것이다.
며칠 전 여고동창회에 참석을 했다. 어느새 졸업한지 52년이 되었다는 말에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오손도손 모여앉아 밥을 먹으며 그 시절에 있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내가 그랬다고? 너도 있었냐고,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이야기 속에 있었던 친구들의 기억은 같지 않아 자주 끊기곤 했다.
내가 기억하는 하느님은 어떤 모습이며 내게 무슨 말씀을 하셨을지. 십년 전 들었던 메시지를 정확히 기억을 하고 있는지, 묵상을 통해 점검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