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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성지 신부님 글

영성 생활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0-01 조회수 : 214


이제 완연한 가을입니다. 맑고 화창한 가을 하늘이 한 동안 우리를 비추어 주었는데 이제는 제법 쌀쌀해지기도 한 느낌입니다. 순례객들도 모두 돌아가고 성지 문을 닫고 나면, 금방 어두워지면서 차가운 기운이 감돕니다. 그렇게 어둑해진 성지 마당에서 자연스럽게 울창한 나무들로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이제 곧 색이 변하고 또 하나씩 떨어지겠구나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순교자 성월을 지내면서 순례객들에게 순교자의 죽음에 관하여, 그 고통에 관하여 이야기를 드리곤 했었는데, 성지의 자연은 계절의 흐름과 함께 다시금 신앙에로 초대해 주는 좋은 자리가 되어주는 듯합니다. 넓지 않은 성지 부지이지만, 오늘도 이곳에 머물다 돌아간 교우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기를 바라며 기도해 봅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의 첫 달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새로운 한 달을 맞이하며 후원 가족 여러분들께 인사를 전합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그리 평온하지는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너무 극단으로 오가는 현실이 아니라면 평온함과 어수선함 중간 그 어디쯤에서 적응하여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 자체를 두고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실재(實在)이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어려움과 시련으로 다가오는 많은 것들 속에서 어떻게든 이겨내고 극복해 내어 다시 굳건해지려는 노력의 결과물일 때가 많기도 하겠습니다. 끈질기게도 우리를 괴롭혀왔던 감염병의 시대에서 벗어나고 있고, 안팎으로 끊이질 않는 사회적 혼란함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삶을 꾸려 나가는 결실이 있지요. 신앙이라는 것도 그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큰 힘이 되어주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한편 우리의 영성생활도 이와 비슷하여, 가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고 그곳으로 향해가는 여정을 걸어갑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현실에서처럼 빛과 어둠 중간 어디쯤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가도 다시 뒷걸음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만, 여기에서 우리도 나름 앞으로 나아가며 굳건해지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그 결실을 맺어 갈 때도 있지만, 반대로 주어지는 상황의 탓으로 돌리며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적응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가 됩니다.

현실에서 겪게 되는 문제들은 혼란함과 어려움의 환경에서부터 벗어나면서 희망을 얻게 되지요. 우리가 가게 되는 신앙의 여정은 단순히 무언가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방을 통하여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자유의 여정이 되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 아니라면 단순한 벗어남은 오히려 근본이신 분과의 일치와 동행을 방해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의 많은 장면들에서 봅니다. 종살이에서 해방된 백성들이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기까지의 숱한 이야기들은 우리 현실의 삶을 이겨나갈 바탕이 되는 영성이 되어줍니다. 뿐만 아니라 성모님과 순교자들로부터 배우게 되는 보화도 거기에 있겠지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신성모님의 영성이 조금은 더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근본적인 힘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달리 바라보고 극복해 나가는 법을 배워나가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현실과 신앙은 구분되지 않고 연결되는 것입니다.

차근차근 묵주 알을 하나씩 정성껏 굴리며 차분한 마음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히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잘 알고 계시는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작은 기도와 성모님의 전구 하심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