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농성지를 사랑해 주시는 후원회원 여러분, 무덥고 습하고 비가 많이 내렸던 올 여름 잘 이겨내셨지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강력한 태풍 예보로 긴장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지만 계절이 갈마들게 마련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드디어 풍성한 계절, 아름다운 계절, 시원하고 상쾌한 계절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참 좋은 가을의 시작과 함께 우리들은 ‘순교자 성월’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해 하늘보다 높은 사랑과 믿음으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신 순교자님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잠시면 지나갈~ 이 세상 속에~ 즐거움을 집착, 하지 않게 하소서~~♬”
제가 좋아하는 갓등중창단의 ‘순례자’라는 찬양 가사입니다. 순례자는 정착하고 머무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늑하고 편안한 보금자리를 떠나는 사람입니다. 마치 어미 독수리가 새끼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둥지를 흩뜨리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한없이 머물러 눌러앉고 싶은 현실에서 끊임없이 떠나야합니다.
아브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고향, 친족,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순례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창세 12,1). 위대한 왕 다윗이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로 뽑혔을 때, 사울의 추적은 끝이 없었고 다윗은 계속하여 떠나는 삶을 마주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아버지와 가족과 배를 버리고 떠나는 순례의 삶에 응답하였습니다(루카 5,11). 우리 어농성지의 복된 윤유일 바오로 복자님도 한국교회 최초의 밀사라는 사명을 받고 1789년 10월 16일(양력 12월 2일), 매서운 한파와 마주하며 목숨을 담보로 북경으로 향하는 순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의 밀사 윤유일은 한겨울의 3천여 리 길을 가면서 매우 고생스럽고 진정한 위험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 일행 중에서 여러 사람들이 도중에 병으로 쓰러지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공부에만 전념하고 집 안에 들어앉아 있던 젊은 학자 윤유일은 이 낯선 여행이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또 얼굴도 알지 못하는 일행 가운데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고독한 길을 가야만 했던 그에게는 보통의 피로도 더 크게 느껴졌다. 만일 그에게 진리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중에서 -
순례자의 삶은 불편합니다. 잠자리도, 먹을 음식도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위험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안한 삶입니다. 그렇다고 편안한 삶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불편함이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은 편안한 삶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으로 알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의 목표는 순교자들의 뒤를 잇는 ‘순례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도 용기 내어 순례의 길을 걸어갑시다.
PS. 좋은 계절 가을에 꼭 한번 어농성지에 순례오세요~~^^
어농지기 박상호 바실리오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