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어농성지를 사랑해 주시는 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안에 깊이 젖어드는 ‘예수 성심 성월’이 찾아왔습니다. 코로나의 기운이 더욱 약해지면서 우리 어농성지를 찾는 발걸음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코로나와 여러 가지 이유들로 어농성지를 방문할 수 없으셨던 신자분들도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성지를 찾아오셔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사랑을 많이 받으시기를 기도드리는 요즘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 10,11-
우리 성지에서 현양하는 순교 복자님들 중 한국교회 최초의 목자님이 계시다는 사실 다들 알고 계시지요? 네. 바로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이 이 땅의 첫 번째 목자님이십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1752년 중국의 소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고모 슬하에서 성장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까지 돌아가셨으니 성공과 출세의 방법은 시험을 통과하여 관직에 오르는 것임을 깨달았지만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20살이 되어 결혼을 했는데 불과 3년 만에 아내의 죽음으로 사별을 맞이했습니다. 인생의 참 의미를 깊이 묵상하던 그는 하느님 안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고, 북경 신학교에 입학하여 40세 경의 늦은 나이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윤유일 바오로 밀사를 통해 조선교회의 소식을 들은 구베아 주교님은 신앙심이 깊고 조선인과 용모가 비슷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1794년 12월 24일. 조선인 복장을 한 주문모 신부님은 윤유일과 지황을 만나 의주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이듬해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서 신자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미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분해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입국 사실은 북경교구는 물론 조선교회에서도 몇몇 사람만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소식을 접했는지 많은 신자들이 신부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배교자 한영익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님은 붙잡혀갈 위험에 처했지만 최인길의 희생으로 피신하여 강완숙 골롬바의 집 안채에 숨어 지내며 6년의 사목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사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일에 지칠 줄 몰랐고, 식사시간과 잠자는 시간 외에는 성사를 집행했으며 나머지 시간에는 책을 썼다.’ 주문모 신부님은 자신이 없더라도 조선교회가 자립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우리 교회의 체계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회장제도’를 세웠는데 이는 신부가 한 명뿐이기에 지역, 단체, 여성 등 사목에 따라 회장을 임명하여 효율적으로 신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만든 제도입니다. 회장들은 신부를 대신해 지방의 공소를 관리했고, 신자와 신부, 신자와 신자 사이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명도회’를 조직하여 첫 회장으로 정약종을 임명합니다. 그 아래 6회를 두어 황사영, 현게흠 등을 6회 책임자로 두고 교리연구와 선교에 힘쓰게 하였습니다. 정약종은 후에 한국 최초의 우리말 교리서 ‘주교요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1801년 정순왕후의 명으로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강완숙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이 붙잡혀 주문모신부님에 대해 추궁하였으나 목이 잘려 나가면서도 신자들은 신부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를 위해 희생당하는 양떼들을 버려두고 중국으로 피신할 수 없었던 주문모 신부님은 1801년 4월 24일, 스스로 의금부에 자수를 하였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입니다. 결국 신부님은 ‘내가 조선에 온 목적은 참된 종교를 전하여 불쌍한 백성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라는 고백을 하시고 5월 3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십니다. 주문모 신부님을 비롯한 정약종, 강완숙 등은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목자로서 양떼를 위해 사목하시고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신 주문모 신부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며 예수성심성월을 힘차게 살아갑시다.
어농지기 박상호 바실리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