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한 달이 시작되고 새로운 계절도 어느새 다가왔고, 새로운 절기도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교회 안에서 선포되고 전례로 기념되고 말씀으로 그 뜻이 깊이 주어지는 때를 지나, 이제 깨닫게 된 사랑의 성심을 잘 간직하며 살아가는 시기를 맞이한 것이지요. 그에 맞추어 더 밝게 빛나는 햇살 속에 녹음도 깊어지고 있어, 성지에서도 야외 미사터로 오르는 길은 높이 자란 나무 양쪽으로 잎이 푸르게 가득 차서 마치 터널과도 같은 느낌이 들곤 합니다. 성지의 후원 가족 여러분, 성모 성월 안에서 삶의 여러 일들을 마주하며 기도로 의탁하며 지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족한 성지에서의 기도를 더하며 다시금 새 마음을 안고 인사드립니다.
작년부터 새로 가꾸었던 성지 내 작은 동산 이곳저곳에 여러 가지 나무와 꽃들을 심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모두 환하게 생기를 띄는 모습은 보지 못한 채 추위가 시작되었었지요. 다시 올 봄을 맞을 때 그 간의 냉기에 죽지는 않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는 마음에 수시로 살펴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 즈음에, 조만간 더 따뜻해질 날씨 속에 밝게 피어나 성지를 아름답게 가꾸어줄 기대로 크고 넓지 않은 성당 주변 공간과 순교자 현양비 마당에 색색의 꽃을 마저 심었습니다. 그 꽃들이 제법 피어나 봄 기운을 내주고 있다는 소식도 지난 회보에서 <성지 소식>으로 전해드렸습니다. 또 한 달여가 지난 지금은 피었던 봄꽃들은 지고 또 제 시기에 피어날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식물이 제 모습으로 자라고 꽃이 피어나기를 바라고 기다렸던 적이 있었던가. 애써 심어놓은 아이들이 행여 이 곳 추위 속에 죽은 것은 아닌지, 무슨 문제가 있을지 맘 썼던 때가 있었던가. 새삼 초록의 것들 속에 살고 있음에 그 동안 깨닫지 못했던 감사의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 감사의 크기보다 제 마음에 훨씬 더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조바심’이었습니다. 이미 심었던 아이들을 살피고 나서도, 새로 심은 싹이 영 소식이 없는 듯한 모습을 보고 돌아서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저만이 홀로 가졌던 조바심일 뿐 상대를 향한 애정의 걱정과 돌봄은 아니었더라는 생각이 들게 되니, 매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성지 길에서 보이는 숱한 것들 앞에 작아지는 마음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어 결실을 손으로 거두어 본 적 없는 이 작은 마음의 한 사람은 거룩하신 성심(聖心)에로 더 깊이 물들어야 함을 삶에서 깨닫게 됩니다. 진심의 우려와 희생과 배려에서 나오는 걱정어린 돌봄은 ‘농부이신 아버지’(요한 15,1참조)와 닮은 성심이며, 섣부른 조바심이 아니라 신뢰로써 내어줄 수 있는 인내심은 그 ‘온유함과 겸손함’(마태 11,29참조)에서 나오는 성심의 줄기임을. 진정으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목자로서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 분께 배워야 하는 우리들인가 봅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루카 15,4-6참조)
참된 사랑의 성심에서 나오는 이 기쁨은 우리의 부당함마저 다 담아낼 수 있는 것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이 성심에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그렇게 목자의 기쁨과 우리의 기쁨이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흔아홉이 아닌 한 마리의 회개가 우리에게 필요하더라도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여정이 되어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새로이 피어날 꽃을 기다려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