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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기 성인 유해의 이장에 대한 증언과 기록 8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4-01 조회수 : 234

찬미예수님!


  늘 감사와 존경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사순시기 여정 잘 마치시고 기쁜 부활 되셨는지요. 성지에서도 이번 성주간과 성삼일 전례를 조촐하게 지냈습니다. 부활성야미사 후 다음날 부활대축일 낮 미사에는 많은 분들이 성지미사에 오셔서 좋았습니다. 이제 코로나 19도 점차 수그러지고 사적모임과 거리두기 제한도 없어져서 앞으로 많은 순례자들이 이전처럼 성지를 찾아주실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맞이하여 성지도 자연적으로 아름답게 변모하고 있습니다. 성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산홍이 색색이 꽃봉오리를 띄우며 만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조금씩 꽃이 피고 있습니다. 좋은 날씨 속에서 따뜻한 햇볕과 비를 맞으며 꽃을 준비하는 모습이 무척 신기합니다. 좋은 날씨 같은 주님이 계시다면 그에 화답하는 꽃의 모습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성지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자연을 통한 부활의 기쁨과 아름다움이 많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달에는 장주기 성인 유해의 이장에 대한 증언과 기록, <병인순교자 시복재판록> 1차 교구재판에서 이치문 힐라리오가 증언한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은 병인 순교자 29위를 대상자로 선정하여 1899년부터 1900년까지 교구 시복재판(1차 재판)이 있었습니다. 증거 불충분으로 3위가 탈락된 후 교황청 (위임) 시복재판(2차 재판)이 26위를 대상으로 1921년~1926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시복재판에 출석한 증인과 시복판사와의 질의 문답은 전담 서기에 의해 회차마다 기록되었고, 이를 정리하여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1차, 2차 구분)으로 묵었습니다. 1차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한 이치문은 시복대상자들의 행적, 순교 사정 등을 진술했는데, 자신이 직접 참여했던 장주기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신 수습과 이장 과정에 대해서도 증언했습니다. 1882년 블랑 부대목구장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비해 내용이 간략하며, 기억하는 연도와 날짜가 서로 다릅니다. 


<병인순교자 시복재판록> 1차 교구재판 83회차 (1900년 3월 22일)

제21조목대로 물은 즉 답왈 : 죽은 후 얼마 안 되어 법장(法場)근처에 안(다블뤼) 주교, 오(오메트르), 민(위앵) 신부 세 분 신체는 한 무덤에 외(교)인들이 묻고, 또 황(석두)루카, 장(주기)회장 두 시체도 다른 무덤에 함께 그 외(교)인들이 묻었삽더이다. 병인(1866) 4월 초아흐레 날(양력 5월 22일)에 죄인(증인 이치문)과 죄인 형 둘 이끼수(이삼철)와 이(치서) 이냐시오와 이 바르나바와 김성집이와 장(주기) 회장의 아들(장노첨)과 또 다른 교우 몇이 가서 안(다블뤼) 주교, 오(오메트르), 민(위앵) 신부, 장(주기)회장의 시체를 거두어 염하니까, 날이 새옵더이다. 빨리 염하여 가지고 한 10리 되는 데로 모셔다가 네 구덩이를 나란히 파고 관 없이 묻었더니, 그 후에 말 들리기를 “짐승들이 송장 파먹는다” 하여서, 죄인 부친(이사심 바오로)이 무덤자리를 가보고 “다른 데로 옮겨야 하겠다” 하여서 그 해 7월 초아흐레 날(양력 8월 18일)에 죄인과 형 이끼수와 조카 바르나바 등이 가서 신체를 파서 외(교)인 최가의 배에 실었더니, 바람이 대단히 부는 고로 보름 동안 고생하다가 간신히 남포 서지동(서짓골)에 네 구덩이를 나란히 파고 네 신체를 관 없이 묻고 한 봉분으로 덮었습니다. 죄인이 강경이에 살제 백(블랑) 주교가 신부 때에 죄인보고 말씀하시기를 “그 신체를 장사한 사람 중에 너희 형제 밖에 그 무덤 자리를 아는 이가 없으니 네가 죽기 전에 파오라” 하시기에, 죄인과 죄인 형 이 이냐시오 치서와 죄인 조카 이 안드레아와 김성보와 합 4인이 대개 신사년(1881)봄 2월 즈음에 가서 네 신체를 파서 백(블랑) 주교께 바쳤더니, 백(블랑) 주교께서 “그 시체들을 네 집에 두었다가 누구 오거든 주어라” 하시기에, 한 달포 동안 죄인 집에 두었더니 어느 교우가 와서 법국(法國: 프랑스)으로 들여간다 하기에 내주었습니다. 그 후로 어떻게 된 줄 모릅니다.  


  순교하신 후 외교인들이 묻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를 이치문을 비롯한 교우들이 가서 다시 염을 하자 날이 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될까 빨리 염해서 10리 되는 곳에 네 구덩이를 파고 관 없이 나란히 묻었는데 후에 짐승들이 “송장 파먹는다”는 소리에 무덤을 다시 살핀 다음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양력 그 해 8월 순교자들의 무덤을 다시 파서 배를 타고 이동하는데 바람이 불어 보름 동안 고생하다가 남포 서지동이라는 곳에 네 구덩이를 파고 네 신체를 관 없이 묻고 한 봉분으로 덮었습니다. 후에 블랑 주교는 이들 순교자들을 장사한 사람 중에 이치문 형제 밖에 무덤 자리를 아는 이가 없으니 죽기 전에 파오라 하고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길 때까지 달포 동안 순교자들의 시신을 이치문의 집에 모시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생생한 증언입니다. 순교자들의 시신을 처음 수습하고 다른 곳에 장사지낸 후 다시 파서 안전한 곳에 장사지낸 다음 시간이 흘러 교회가 순교자들을 모시려고 하자 장사지낸 곳을 다시 파서 그 유해들을 다음 지시가 있을 동안 달포동안 모신 이치문 힐라리오의 수고와 정성이 생생히 느껴집니다. 이치문 힐라리오와 교우들의 수고 덕분에 교회는 이들 네 분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전하게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요당리 성지에 모셔져 있는 장주기 성인 유해의 일부도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러 성지를 찾는 신앙의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