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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당리성지 신부님 글

장주기 성인 유해의 이장에 대한 증언과 기록 7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3-01 조회수 : 174

찬미예수님!


  늘 감사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 순례자 여러분 지난 한 달간 안녕하셨습니까? 코로나 오미크론으로 국민의 1/5이 감염되었다고 합니다. 코로나에 무탈하신지요. 저는 다행히 아직 무탈합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그간 성지 순례자가 많이 준 것이 사실입니다. 요즘 성지 평일미사엔 적으면 다섯에서 여덟 분, 많으면 열에서 열다섯 분 정도 참례하고 계십니다. 주일에는 오십여 분 정도 참례하십니다. 더 줄어들면 어쩌나 살짝 걱정하고 있던 차에 요당리성지 회보 창간호를 보게 되었습니다. 회보엔 성지 초대신부님께서 허허벌판에 컨테이너 안에서 미사를 봉헌하셨는데 순례자가 인근 마을에 사시는 할머니와 자매님 한 두 분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빈 마음’을 묵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훗날 이 성지가 완벽하게 조성되더라도 이 빈 마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에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라고 미사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성지 초창기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함보다는 걱정을 했으니 이 ‘빈 마음’을 오늘의 제가 묵상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당리 성지를 조성해주시고 ‘많은’ 순례자가 찾아오도록 해주신 하느님과 역대 신부님들께 감사드리며 요당리 성지의 장주기 요셉 성인에 대한 자취를 계속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달에는 병인 순교자 약 990명의 사적이 수록된 <병인치명사적>에 있는 방시영 프란치스코의 보고서(1882년 5월 2일 작성)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보고서는 1866년 장주기 성인과 성 다블뤼 주교, 성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신부의 유해를 수습하고 이장하는데 참여했던 방시영이 그 내용을 당시 부대목구장 블랑 신부에게 보고한 문서입니다. 두 차례에 있었던 이장 중 첫 번째 이장에 참여했던 방시영이 당시 사정과 참가자의 명단을 서술했습니다. 


전거 : <병인치명사적> 24권 68~70쪽.(절두산 순교박물관 소장 필사본)

원본 대조, 판독, 역주 : 수원교회사연구소


백(白, Blanc 블랑) 신부 주전(主前) 상살이(上白是: 아룀) 


요외(料外: 뜻밖에)에 하서(下書: 편지) 받자오니 복희만만(伏喜萬萬: 엎드려 대단히 기쁘옵니다.)이로소이다. 복불심이래(伏不審以來: 엎드려 삼가 살피지 못한 이래)에 신부주(神父主: 신부님) 기체후(氣體候: 몸건강) 안녕하옵심 복모(伏慕: 엎드려 바람)하옵나이다. 죄인(증언자)은 하휼지택(下恤之澤: 어여삐 여기시는 덕택)(을) 입사와 완명(頑命: 모진 목숨)이 살아 있사오니 주은(主恩: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하교(下敎: 윗사람이 내린 명령)하신 사단(事端: 일)은 (다블뤼)주교, (오메트르. 위앵) 신부의 시체 거둘 마음(은) 주소(晝宵: 밤낮) 간절하오나 위험한 시절이라고 생각만 하고 있삽더니, 병인(1866) 3월에 장(주기) 회장의 아들(장노첨)이 와(서) “가자” 하옵기 4월 초에 장(주기) 회장의 아들과 한가지로 (충청 보령 고마) 수영(水營)(에) 들어가 시체 있는 곳에 둘이 다 가는 것은 불긴(不緊: 불필요)하다 하여, 장(주기) 회장의 아들(이) 혼자 시체소(屍體所: 시체가 있는 곳)에 가(서) 보고 나와 장(주기) 회장 아들 말이 “나는 타처(他處: 다른 곳)에 심방(尋訪: 찾아감)할 사람이 있어 가니, 곧 나아가 (장주기의 조카) 장치선(장치선(張致善)과 상의하여 사람 3~4명과 염포(殮布: 시체를 싸서 묶을 삼베)를 구처(區處: 변통함)하여 가지고 초8일로 장사하게 오라” 하옵기(에) 나와(서), 장치선을 보고 연유(緣由) 말을 하온즉 염포와 사람 네 명을 구변(求變: 구하고 변통함)하여 한가지로 “가자” 하옵기(에)

(4월) 초8일(양력 5월 21일) 미쳐 가서 각처 사람이 한가지로 한 패는 광중(壙中: 무덤구덩이)을 역사(役事: 일)하옵고, 한 패는 시체를 모셔오고 분주히 하오나 날이 평명(平明: 해가 뜨는 시각)이 되오니, 황황급급(遑遑急急: 바쁘고 급함)하와 장사도 못하옵고 날이 밝은즉 “다 주인에게로 갈 수 없으니, 이곳에서 산으로 나아가라”

하옵기(에), 손자중(孫子仲)과 장(주기) 회장의 아들과 남포(藍浦) 사람만 장사하라 하옵고 죄인은 데리고 간 사람들과 한가지로 왔사오며 그 때에 쓴 돈은 장(주기) 회장의 아들 말만 듣고 소용(所用: 쓸 경비)은 염려 말라 하옵기(에) 그런 사단은 알은 체 아니 하였사오며, 그 후 이장(移葬)은 죄인은 모르오며 그 때 왔던 사람도 혹 모르는 사람이 있사오나 피차(彼此: 서로) 인사도 못한 이가 있사온즉 죄인이 똑똑히 아는 사람만 후록(後錄: 뒤에 기록함)하나이다. 수다(數多)하온 말씀(을) 필설(筆舌: 글과 말)(로) 다 못하였사오니 뵈옵고 자세히 사뢰리다. 

신부주 기체후 안강(安康)하옵심(을) 바라옵나이다. 


  임오(1882) 3월 15일(양력 5월 2일) 방 프란치스코 상백(上白: 아뢰어 올림)

  장(주기) 회장 아들, 임중심 – 외(교)인(비신자)

  손자중, 죄인 방시영

  방순오, 김성도, 서도심


  성 장주기 요셉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