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는 수시로 변형을 하며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확진 환자가 십 단위는 까마득한 옛날의 수치로 되었고 이젠 만 단위로 올라왔다. 전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접은 유럽의 일부 나라는 공존으로 간주해 코로나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감기나 독감쯤으로 여기자는 추론일 것이다.
감기가 됐든 독감이 됐든 감염에 취약한 대상은 노인층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는 되도록 가지 않아야하고 타인과의 식사자리도 당연히 삼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 먼저 걱정이 되는 게 흐린 판단력이다. 공정과는 상관없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자식에 대한 무한의 기대와 손자에 대해 무조건 사랑에 눈이 멀어 죄인지도 모르고 덮어주려는 경향이 생긴다.
얼마 전 영화를 보았다. 아르헨티나영화인데 “가족의 죄”이다. 아르헨티나는 92%가 가톨릭신자다. 모든 근원과 가치기준이 가톨릭신앙에서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인 신자생활을 하고 있다. 영화의 내용은 은퇴한 노부부와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는 이성적이고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에 빠져 무조건 믿는다. 이 믿음이 얼마나 그릇된 판단을 하게 만들게 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아들은 중범죄에 해당되는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가 있다.
늙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면서 훌쩍이면서 자신은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능력 있는 변호사를 고용하자고 남편에게 요구한다. 변호비용이 만만치 않아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 하고 살림의 규모를 줄여야한다는 것을 남편이 이야기하지만 어머니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아들이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들이 일으킨 범죄의 뒤치다꺼리로 이미 많은 재산을 축냈고, 아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들에 대한 거침없는 사랑에 지쳐 집을 떠나겠다고 한다. 어머니는 남편이 떠나는 것보다 아들의 억울함이 더 중요했다. 변호사의 활약으로 아들은 석방이 되었다. 아들의 범죄를 가정부를 통해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의 전처에게 증거서류를 건네준다. 아들은 다시 구금이 되고 또 어머니에게 석방을 시켜 달라는 전화를 걸지만 어머니가 외면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소재로 만든 영화이다. 늦었지만 어머니는 올바른 판단과 지혜로 거짓을 물리친 것이다. 죄와 벌은 평행이어야 한다. 수많은 죄를 짓고도 죄책감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언젠가는 그 죄에 대한 벌이 주어진다는 것을 모를까.
하느님께서는 옳은 행동엔 상을 주시고 그른 행동엔 벌을 주신다. 한쪽으로 기운 편견이 죄를 짓거나 덮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영화가 긴 여운을 남겼다. 어떠한 일에도 성찰하지 않고 자기방어에 급급하다면 누군가는 억울해할 것이다. 자신에게만 너그럽고 타인에게는 엄격함을 요구한다면 그것도 죄의 씨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공평한 생각을 갖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