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회는 (마리아니스트) 복자 윌리엄 요셉 샤미나드 신부의(Blessed William Joseph Chaminade, 1761. 4. 8 ~ 1850. 1. 22) 창립 정신에 따라,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적그 협조하여 마리아의 현존의 삶을 살려는 수도 공동체이다.
창립자의 고향에서 프랑스 혁명(1789 ~ 1794)이 일어났을 때 교회가 역할을 하지 못하는 어두운 상황속에서 교회의 재건과 신자들의 재교육, 무지한 사람들의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1801년에 신심회인 소달리티를 시작으로 1816년에 마리아의 딸 수도회가, 1817년 10월 2일 마리아수도회 탄생하였으며, 지금은 전 세계 34개국에서 활동하는 구제적인 수도자 단체이다.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는 모토 아래 한국에는 '마리아 수도회'(남자수도회), '마리아의 딸 수도회'(여자수도회) 및 '마리아니스트 평신도 공동체' 회원들이 마리아가 사랑받게 하고, 봉사받게 하고, 마리아를 알리는 일에 힘쓰고 있다.
마리아회의 창립자 복자 기욤 요셉 샤미나드
1761년 4월 8일 프랑스 페리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두터웠고, 1850년 1월 22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직 마리아의 선교사로서 마리아의 영광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분수령이었다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혁명시대였다.
그는 1782년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사제로 서품된 후 고향인 페리구 교구의 작은 도시인 뮤시당에 돌아와 사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프랑스 혁명 기간 공포시대는 인간성과 사랑과 양심의 부재를 가져왔고, 교회는 박해시대를 맞이하였다. 샤미나드 신부는 몇몇 성직자, 평신도들과 함께 지하교회를 이끌면서 비밀리에 성무집행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도 결국 스페인으로 망명하였다.
스페인 사라고사에서 3년간의 은둔 생활은 그에게는 고난과 은총의 시기였다. 사라고사에는 유명한 필라르의 성모 성당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그는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그것은 마리아의 이름으로 마리아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마리아의 이름으로 단체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 계획을 받아 들이셨다.
샤미나드 신부는 1850년 1월 22일 선종하는 그 순간까지 마리아께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살았던 마리아의 사도였다.
사명
모든 형태의 사도직에 열려있지만 우리는 "신자들을 배가시키는" 사도직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곧 믿음을 각성시키고, 신자공동체를 형성시키며 특히 젊은이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것을 우선으로 한다.
카리스마
마리아의 계약으로 우리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지고 사랑받으시게 하며 섬김을 받으시도록 함으로써 마리아의 사명을 지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