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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편집 - 만천유고|

  • 박용식(pgksehf)
  • |조회수 : 474
  • |추천수 : 0
  • |2019-08-27 오후 3:27:09






악마의 편집 - 만천유고



서종태 교수는 2016616, 수원교구에서 개최한 만천유고성교요지관련 심포지엄에서 만천시고에 수록된 70수 중 이승훈의 저작으로 단정할 수 있는 시가 단 한 편도 없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홍석기(洪錫箕1606~1680)만주유집(晩洲遺集)’에 버젓이 실린 두 수의 시가 슬쩍 끼어든 것까지 찾아냈다. 게다가 여타 작품 속에는 20대 후반의 이승훈이 지은 것으로 볼 수 없는 노년의 심회를 표출한 작품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해 이 시집은 의도적으로 여러 사람의 시집을 짜깁기해서 엮은, 대단히 교활한 악마의 편집이다. 이승훈의 한시는 단 한 수도 없다. 필자가 확인해보니, 시고 70수 중 뒷부분에 수록된 계상독좌(溪上獨坐)’부터 마지막 양협노중(楊峽路中)’에 이르기까지 무려 2126수가 통째로 양헌수(梁憲洙1816~1888) 장군의 하거집(荷居集)’ 4에서 가져왔다. 양헌수는 1866년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 수성장(守城將)으로 프랑스군을 패퇴시켰던 무장이다. 이승훈이 죽고 15년 뒤에 태어난 양헌수의 시가 통째로 이승훈의 작품으로 끼어들었다.

 

만천시고에는 밤에 이덕조와 함께 달구경을 하다가 당시 절구의 운을 차운하여 짓다(夜與李德操玩月次唐絶韻)’ 2수가 실려 있다. 이벽이 아직 살아 있을 때 함께 달 구경을 하며 지은 시다. 하지만 하거집에는 이 작품의 제목이 밤에 취정 이문경 복우와 더불어 달구경을 하다가 당시 절구의 운자를 차운하여 짓다(夜與翠庭李聞慶福愚玩月次唐絶韻)’로 나온다. 사람 이름만 슬쩍 바꿔 치기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다산의 고향집 인근의 우천(牛川)과 마현(馬峴), 양협(楊峽) 등의 지명이 등장하는 시를 배치하여 이승훈의 시임을 의심치 못하게 했다.

 

만천유고끝에 무극관인(無極觀人)이란 이가 쓴 발문이 실려 있다. 발문은 이렇다.


평생 옥에 갇혔다가 세상에 나와 죽음을 면한 것이 30여 해이다. 강산은 의구하고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은 그림자가 변함없건만, 선현과 지구(知舊)는 어디로 가버렸는? 목석 같이 겉도는 신세로 거꾸러진 처지 가운데 전전하고 있다. !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난 만천공의 행적과 여문(儷文)이 적지 않았으나, 불행하게도 불에 타버려 원고 하나도 얻어 볼 수가 없었다. 천만 뜻밖에 시고와 잡록 등의 조각 글이 있는지라, 못 쓰는 글씨로 베껴 쓰고는 만천유고라 하였다. 봄바람에 언 땅이 녹고, 마른 나무가 봄을 만나 새싹이 소생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이 또한 하느님(上主)의 광대무변한 섭리이다. 우주의 진리가 이와 같고, 태극이 무극이 되니, 깨달은 자는 이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을진저. 무극관인.”

 

무극관인은 앞선 여러 연구자들이 다산 정약용이 틀림없다고 특정했다. 이 글은 의도적으로 다산이 쓴 것처럼 보이게 하려 애를 썼다. 옥에 갇혔다 죽음을 면하고 살아남아 30여년을 살았고, 이승훈과 막역한 사이였으며, 하느님의 광대무변한 섭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다산 외에 다른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한문 문장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게다가 양헌수의 하서집을 베낀 것이 드러난 이상 무극관인의 발문은 당연히 터무니없는 가짜다.

 

결론적으로 이승훈의 만천유고만천시고는 전체 70수 중 절반가량이 다른 사람의 시를 절취해온 가짜 시집이다. 나머지 밝혀지지 않은 작품도 경기 용인과 광주 인근에 살던 문인의 문집에서 베껴온 것임에 틀림없다. 나머지 부분의 원작자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본다. 떠들썩한 등장과 눈부신 조명에 비해 그 끝이 너무 허망하다.


............................

 

정민 교수의 다산독본 波瀾 1권. p. 318-321(천년의 상상 2019년 9월 5일 초판발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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