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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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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 조회수 : 132
  • |추천수 : 0
  • |2019-08-13 오전 9:18:03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신명기 31,1-8
마태오 18,1-5.10.12-14 
 
< 애정과 사랑의 차이 > 

많은 영화들은 가족의 소중함을 그립니다. 
아내나 자녀를 살리기 위해 부모가 희생하는 그런 영화들이 많습니다.
가족의 사랑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생충’(2019)이란 영화는 그 가족애가 어떻게 다른 이들의 가족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가를 그렸습니다. 
 
기생충은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동물입니다. 
이 영화에서 기생충은 가족애가 강한 가족의 상징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한 가족이 다 기생충이 됩니다. 
가난한 집 가족이 부자 가족 안에서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 가족 역시 가난한 가족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신의 가족의 안위가 우선입니다. 
비가 오면 침수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찾아내는 것은 쾌쾌한 몸에 배인 냄새뿐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보지 못한 채 그 냄새에 코를 막아버립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끼리도 그렇게 잘 지내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 다른 가족을 가두고 그들의 자리를 빼앗으려합니다. 
부자 가족들은 서로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가족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가족엔 무관심해야 할까요? 
그건 또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은 하느님이 맺어주신 가장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누굴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가족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 ‘사랑이 이기적이 될 때’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었다는 증거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는 마음”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업신여기지 않는 마음은 한 영혼이라도 주님 품에 안기고 싶어 하는 선교의 열정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작은 이들’입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 어린이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작은 이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이들도 나의 가족으로 보일 때 비로소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기생충이란 영화에서 그나마 타인의 가족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아이들뿐입니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안고 뛰지만 아이는 쓰러진 다른 가족의 아이를 업고 뜁니다. 
어른은 가족이 자신의 존재의 연장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새로운 가족을 꾸리기 위해 타인이 자신의 존재의 연장이 됩니다.  
 
그러니 재난의 상황에서 자신의 가족만을 챙기지 않습니다.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가족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모든 이들이 나의 가족처럼 여겨지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8-50) 
 
결국 마지막 날에는 신앙을 갖지 않았던 나의 가족보다는 신앙을 함께 했던 이웃과 한 가족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가족의 사랑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하느님 뜻이 들어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믿지 않는 모든 이를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부모도 미워해야 하고, 배우자도 미워해야 하고, 
형제나 친구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4,26 참조).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우상숭배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기 위해 나선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모세가 레위지파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칼로 치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각자 허리에 칼을 차고, 진영의 이 대문에서 저 대문으로 오가면서, 저마다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여라.’”(탈출 32,27) 
 
먼저 부모를 떠나고 가족을 떠나지 않으면 그 애정부터 지키기 위해 타인에게는 무관심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포용력이 커지려면 인간적인 애정부터 끊을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애정이 사랑이라고 믿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애정은 집착입니다. 
사랑은 오히려 버릴 줄 아는 것입니다. 
버릴 줄 모르면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십자가에 버렸습니다. 
이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돈을 사랑한다면 꼭 쥐고만 있지 않고 더 가난한 사람에게 보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돈이 그 가치대로 쓰이게 만들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애정을 포기할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처럼 되기 위해서는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나의 새로운 가족의 일원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나의 자녀를 선교사로 오지로 보낼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자녀를 참으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