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7일 [연중 제26주일] 
 
오늘의 주제는 회개이다. 자신들의 운명을 조상 탓으로 돌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개개인의 운명은 하느님 앞에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사회 관념론이 오늘날에도 일반 사회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우리 자신들보다는 사회적 구조에다 그 탓을 돌리려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28절) 당신께 돌아서기만 하면 다시금 살려주시는 분이시다. 
 
복음: 마태 21,28-32: 맏아들은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오늘 복음의 두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유다인들의 자세를 말한다. 즉 율법에는 ‘예!’하면서도 그리스도께는 ‘아니오!’라고 하는 모습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가지 질문, 즉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28절) 와 마지막에 나오는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31절)라는 말씀은 듣는 사람들에게 경각심 내지는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이 어떤 아들과 같은지 판단하게 될 것이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는지를 잘 분별하고 있다면, 왜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두 아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초대에 인간들이 응답하는 두 가지 형태의 태도를 의미한다. ‘예!’하고 대답은 했으나 실제로는 회피하는 둘째 아들의 형식적인 존경에 의한 행동과 처음에는 거부하였지만, 나중에 행동으로 옮긴 맏아들의 갈등과 깊은 사고에 의한 일치 행동이 그것이다. 맏아들은 무례하긴 했으나 사실상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또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종교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는 추상적으로만 신앙을 받아들이는 형식주의적 종교로서 의지적 노력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요구를 실현하는 행동주의적 형태로 많은 수고를 치르는 형태이다. 즉 처음에는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나중에 힘겨운 자기반성과 생각을 바꾸어 다시 받아들인다. 즉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29절).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 형태의 종교를 만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같이 신앙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모든 규정을 엄격히 지켰던(마태 23,13-32)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이 그들의 ‘뜻’과 일치할 때 쉽게 ‘예!’하며 응답하며 그 뜻을 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이 그들의 뜻하는 길과 일치하지 않으면 온갖 수단을 써서 반대하고, 그들이 예수께 한 것처럼 물리적인 폭력까지 쓰기도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의심하였을 때, 그 뜻은 더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한편 이들 주변에는 강도들, 세리들, 창녀들과 같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힘겹게 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복음은 ‘해방’의 메시지로서 그들을 ‘아버지’의 집에 떳떳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복음은 그들의 인간적 품위를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자신을 변화시켰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절).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자신들이 비교된다는 것 자체를 치명적인 모욕으로 느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라고 하신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32절).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회개할’ 수 있으나,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올바르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회개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뜻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 이 때문에 세속적인 기준으로 자신들을 ‘첫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빛으로는 ‘꼴찌’가 될 수 있음(마태 19,30; 20,16 참조)을 표현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범적 태도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8절)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일치하신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5절) 하도록, 즉 하느님의 뜻에 완전한 ‘순명’의 태도를 보이도록 권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앞에 의심이나 재고의 여지가 없는 철저한 ‘예!’의 태도였다. 즉 '아니오!‘의 부정적인 태도도 아니었고 게으르고 무기력한 ’예!‘의 태도가 아니었다. 두 아들의 비유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극복되었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는 이해관계로 빚어지는 내적 분열이며, 이기심과 교만에서 야기된다고 한다(1-4절 참조). 사도 바오로는 이 점을 깊이 새겨주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의 모범을 예로 든다(6-8절 참조). 그러나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시어 ‘높이 올려주셨고’ 온 세상의 ‘주님’으로 세워주셨다(9-11절 참조). 
 
하느님의 뜻에 대해, 하느님의 일에 대해,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철저한 선택과 이에 따른 철저한 응답으로 살아간다면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담을 수 있으며, 그분을 닮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향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하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