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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29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9-29 조회수 : 162

복음: 마르 9,38-43.47-48: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모세는 여호수아를 꾸짖으며, 하느님의 영을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지극히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인간이 멋대로 지배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고, 우리가 다른 형제들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인 듯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형제들의 응답 능력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신자는 아니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신앙이 올바로 성숙하지 못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려고 하는 바리사이적 위험이 있다. 예수님은 이런 벽을 허물고 모든 진리의 씨앗들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기 위해 그들과의 접촉점이 무엇인지 발견하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논쟁적이거나 배타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모아들이고 너그러이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에서는 구마 행위를 하던 사람에 대해 요한은 예수께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도록 막아 보려 하였습니다.”(38절) 말씀드린다. 이것은 어떤 차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어야 할 선물로서가 아니라, 질투심에 의한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께서는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하신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려는 듯한 것 같지만,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자신들을 진리의 소유주와 같이 자처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와 어떤 신앙의 공통점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우리를 개방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써 인간 상호 간의 대화와 또한 그리스도인들 간의 일치운동 근거를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마태 12,30) 하신다.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약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분을 해치게 되고 그 결과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진리와 선은 부분적으로는 다른 곳에도 존재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은 그러한 미세한 것을 통해서도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은 교회라는 테두리는 물론 교회 신앙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요한이나 여호수아처럼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성령을 받거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공경하는 데 대해 질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 우리의 신앙은 어떤 형식이 아니다. 때로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실천적 생활이다. 사도들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유다인들이나 이교인들이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처음부터 권위의 태도가 아니라 봉사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공동체 내의 어떤 사람도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신앙의 위기에 놓일 수 있는 사람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목에 달린 연차맷돌은 예수의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무덤도 갖지 못하게 되는 버림받은 인간의 최고의 불행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죄를 짓게 하는 인간 신체의 세 가지 상징적 표현은 아주 소중한 것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치명적으로 영원한 파멸을 초래할 죄로 인한 벌에 비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43-48절).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엔나(Geenna)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힌논(Hinnon) 계곡을 말하는데 버림받은 자들이 버려져 화장되던 곳이다. 그곳은 항상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는 악한 이들을 벌하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던 곳이다.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로 육신의 일부를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윤리적 영적 의무의 차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선택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우리가 선택을 잘못하면 우리가 잃는 것은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불의한 방법으로 부자들이 쌓았던 그 재물은 실제로 마치 녹이 쇠를 부패시키듯이 그들 자신을 갉아먹을 녹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재물은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영원히 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탐욕을 생기게 하는 눈을 빼어버릴 용기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르 9,47). 오늘의 말씀은 대단히 준엄한 가르침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잃는 것이 곧 자신을 찾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나 공동체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도 사랑 안에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이 사회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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