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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2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1-02 조회수 : 693

어떤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보다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가는 글을 쓸 때 쾅쾅 울리는 시끄러운 옛날 노래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면 글이 잘 써져서 빗소리 ASMR을 듣는다는 분, 클래식을 듣는다는 분, 벌거벗은 채로 글을 쓴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거의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지만(주로 제 방입니다), 잘 써지지 않을 때는 백색 소음이 있다는 카페를 이용하곤 합니다.

 

글 쓰는 것은 똑같은데 그 상황은 모두가 달랐습니다. ‘같은 일도 다르게 한다’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렇다면 다르게 한 것을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다를 수도 있는 부분을 틀렸다고 하면서 자기 방식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까지 잃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라면서 획일화시키려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에게 ‘같은 일도 다르게 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르게 하는 그 과정 안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결과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더 큰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는 것과 남이 찾아주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같은 일도 다르게 할 수 있음’을 주님께서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성장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려고 할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점을 인정하지 못하고 의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고도 그러했습니다. 자기들과 달리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닌, 엘리야의 모습으로 극기와 겸손의 삶을 산 것입니다.

 

자기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서 바리사이들은 따지듯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답인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말했으면 편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남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선택하면서, 스스로 낮춥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얼마나 겸손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교만과 이기심으로 다르게 할 수 있음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인생은 너무 짧아서 다투고 사과하고 가슴앓이하고 해명을 요구할 시간이 없다. 오직 사랑할 시간만 있을 뿐. 하지만 그 시간마저도 순식간에 지나간다(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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