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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15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10-15 조회수 : 429

복음: 마태 22,1-14: 아무나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해 오너라 
 
오늘 혼인 잔치의 비유는 하느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초대와 말씀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을 초대하시는 잔치를 베푸신다. 이 잔치는 기쁜 구원의 잔치이며 무엇보다 이 초대를 통해. 모든 민족이 시온산을 향해 몰려들고 있다(이사 25,6-10절). 이제 시온산은 모든 이들의 어머니인 교회가 이사야에 의해 미리 시사되고 있다. 둘째로 그 잔치는 잔치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초대받은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인식과 우정을 지향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이사 25,7절). 씌워진 너울과 덮인 덮개는 하느님께 대한 무지나 영적인 눈멂이다. 이것은 잔치를 통하여 진정한 친교를 통하여 없앤다는 것이다. 또한, 그 잔치는 기쁨과 생명, 평온과 안정을 이룬다. 즉 죽음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며 모든 눈물이 닦아질 것이다(이사 25,8절 참조). 이사야는 이 잔치의 개념으로 모든 민족에게 베푸실 마지막 구원을 예고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당신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하신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임금의 관대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의 태도를 묘사한다. 즉 임금의 초대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구원을 포기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아들의 혼인 잔치를 마련한 임금은 초대받은 자들을 부르러 간 자기 종들을 학대하고 죽이자 자기의 군대를 보내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살고 있던 동네를 불살라 버린다. 그런데 동네가 불길에 휩싸였다면(7절) 어떻게 길거리에서(8절 참조) 한가로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동네의 불은 예루살렘 멸망을 암시하며, 그것은 임금의 초대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종들을 잡아 죽이거나 학대를 가한(6절) 행위에 대한 벌로서 해석한다. 여기에서 종들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파견하신 사도들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대되어 첫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자칭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세리와 창녀들”(마태 21,31)과 이방인들이다. 
 
그러나 초대를 받고 그 잔칫상에 앉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님의 집의 식탁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요구하는 행동적인 요구에도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쫓겨난다. 그가 침묵을 지키고(12절) 있다는 것은 자기 잘못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혼인 예복은 잔칫상에 “악한 사람 선한 사람”(10절) 모두 모였다는 데서 발견된다. 혼인 예복은 하느님 나라의 결실로 제시되었던 삶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구체적인 정의이다. 아무런 결실을 내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잘려져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결실을 내야 할 의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무거울 것이다. 초대받은 것만으로는 구원받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14절). 신앙에의 불림이 곧 구원을 결정적인 보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1티모 2,4) 하느님의 은총에 인간은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 하느님의 초대는 단순한 잔치에만이 아니라, 예복까지도 요구하는 “아들의 혼인 잔치”(2절)의 초대라는 하느님의 더 큰 사랑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보여주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의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이 베풀어준 경제적 도움에 감사하면서도 자신의 사도적 사명이 어떤 외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한다. 사도직의 결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신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다른 모든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4,13-14.19).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랑의 결실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신자들이 이루는 결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스승을 큰사랑으로 보살펴준다. 또 하나는 바오로 사도가 이루는 결실로 신자들의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하게 자신이 적응시켜 나감으로써 자신 사도의 의무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 그 아들의 잔치에 초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에 합당한 응답으로서 행동적인 열매를 맺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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